참 요즘은 자식교육 시키기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손자 녀석이 유치원을 졸업하고, 3월초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런데 그냥 동네의 초등학교를 다니면 될 텐데, 굳이 사립초등학교를 치열한 경쟁 끝에 입학을 한다는 소식에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낍니다.
조선조 성종(成宗)시대에 조광조(1482~1519)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 때문에 중종(中宗)에게 사형을 당한 것으로 유명한 선비이지요. 조광조는 학문과 덕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깊이 신임하면서 그를 통해 바른 정치를 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광조를 시기하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더욱 꼿꼿이 뜻을 펴 나갔으며, 반정공신 중, 공이 없는 대신들을 가려내는 둥 과감한 정치를 하였지요.
이에 두려움을 느낀 ‘심정’과 ‘남곤’ 등은 드디어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와 무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희빈 홍씨가 중종에게 나뭇잎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지요.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 벌레가 갈아먹게 한 것입니다.
때맞춰 조광조가 역모를 꾸였다는 상소가 들어오니 드디어 중종은 조광조를 잡아들였습니다. 많은 유생과 백성들이 달려와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고 호소하였으나 결국 조광조는 처형당하고 말았지요.
그 조광조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남곤’이라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냈습니다. 둘은 누가 공부를 더 잘하는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고 우정 또한 깊었습니다. 남곤이 조광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둘은 격의 없이 친구처럼 지냈지요.
어느 날 두 친구는 산으로 놀러가게 됐습니다. 길에는 그들처럼 놀러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쁜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조광조는 마음을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 처녀들에게 관심이 가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인 남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하기만 했습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조광조는 어머니께 돌아와서 자신의 수양이 덜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여성 앞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곤을 부러워했지요. 그러나 조광조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어서 짐을 꾸려라. 우리는 오늘 밤에 아무도 모르게 이사를 해야겠구나.” 조광조는 영문을 몰라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하느니라.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이의 심정이 어찌 잠잠 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목석이지.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있느니라. 나는 너 때문에 이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인 남곤과 사귀지 않도록 급히 이사를 가는 것이다.” 그래도 조광조는 어머니께서 왜 그리 수양이 많이 된 친구와 절교를 하게 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요. 어머니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곤은 목석같은 사람이고,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으며, 냉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면 수양이 있어 보이지만, 속으론 자기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참는다는 것이 너희 나이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없는 무서운 정치를 할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사람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윗사람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래야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데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너를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느냐?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다. 여기서 살면 안 만날 수 없고, 그렇다고 남곤에게 네가 무서워서 떠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부랴부랴 떠나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머니의 판단에 놀랐지요.
“어머니, 그래도 그 친구는 큰일을 하여 나라의 기둥이 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나 지금은 너하고 같이 지내게 할 수는 없다.” 먼 훗날 조광조는 나라의 대신이 되어 바른 정치를 펴나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큰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때 조광조를 해친 사람은 다름 아닌 남곤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조광조 어머니의 자식교육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못지않은 교육 아닌가요? 그래서 아마 지금의 어머니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시키려고 기를 쓰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귀여운 손자가 좋은 환경에서 진실한 친구와 많이 사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네요!
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3월 3일, 불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