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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나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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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나게 살아라.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21/03/04 22:39 수정 2021.03.04 22:41

우리가 세상에 나와 무엇이 가장 급하고 중한 일일까요? 이제 가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입장에선 지나온 입장에서 혹여 빠뜨리거나 잊은 일이 없을까 되돌아보곤 합니다. 아직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가면 언제 다시 올지를 확실하게 모릅니다.

우리 이 근본문제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닐 런지요? 류시화님의 글 중에 ‘기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끼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에게 일격을 당한다고 합니다. 키가 하늘 높이만큼 큰 엄마 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직으로 곧장 떨어져 온몸이 땅바닥에 내 동댕이쳐집니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 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 기린을 세게 걷어차지요. 새끼 기린은 이런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땅바닥에 세게 부딪쳤는데 또 걷어차다니요?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라, 엄마 기린이 또다시 새끼 기린을 힘껏 걷어찹니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말이지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 기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흔들어 댑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지요. 이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걷어차인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새끼 기린은 가늘고 긴 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엄마 기린이 한 번 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찹니다. 충격으로 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난 새끼 기린은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발길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엄마 기린이 달려와 아기 기린을 어루만지며 핥아주기 시작하지요.

엄마 기린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새끼 기린이 자기 힘으로 달리지 않으면, 하이에나와 사자들의 먹잇감이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새끼 기린을 낳자마자 걷어차는 것입니다. 일어서서 달리는 법을 배우라고 자비심의 발로입니다. 그래서 ‘알베르 까뮈’는 “눈물이 나도록 살라”고 했습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그들을 세상에 내 놓는 그 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요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썼습니다. 어떻습니까? 인생은 우리에게 엄마 기린과 같지 않을까요? 때로 인생이 우리를 세게 걷어차면 우리는 고꾸라집니다. 하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차여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납니다. 그것이 인간이 성장하는 방식입니다. 그래도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따로 급한 것이 있습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천만 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 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①생멸 없는 진리와 ②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대산(大山) 종사 법문 집 가운데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운다.」 또한 「중생들의 고뇌(苦惱)의 불이 사방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 보고 있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해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급할까요? 머리에 불이 붙었는데도 끄지 않는다면 우리네 인생이 어떻게 될까요? 그 급한 일이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깨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진리를 깨치지 못한다면 하이에나와 사자에게 잡혀 먹힐 기린새끼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물 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깨쳐야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또 언제 다시 올 것이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중생(衆生)과 범부(凡夫)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지요.

당(唐)나라의 약산(藥山) 유엄(惟儼 : 745~828)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느냐?” “호남에서 옵니다.” “동정호의 물은 가득 찼더냐?” “아직은 요.” “그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렸는데 어째서 아직 차지 않았을까?” 그 스님이 대꾸가 없었지요.

송(宋)나라 때, 천동(天童) 정각(正覺 : 1091∼1157)스님이 말씀하였습니다. 설봉스님이 하직하자 “어디로 가려느냐?” “영중(嶺中)으로 돌아가렵니다.” “올 때는 어느 길로 왔었지?” “비원령(飛猿嶺)을 따라 왔습니다.” “지금은 어느 길을 따라 되돌아가려는가?” “비원령을 따라 가렵니다.”

“비원령을 따라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도 아는가?” “모르겠는데요.” “어째서 모르는가?” “그에게 면목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대가 모른다면 어떻게 면목이 없는 줄 아는가?” 설봉스님도 대꾸가 없었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또 언제 다시 올지를 아시는지요? 그걸 아는 사람이 도를 깨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 덕화만발 가족은 무엇이 바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범부 중생의 탈을 벗고 불보살의 대열에 올라 삼세(三世)를 자유로 할 수 있지 않을 런지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3월 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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