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재보궐선거 결과가 새정치민주연합에 뼈아픈 것은 ‘4 대 0’이라는 일방적 스코어보다 ‘정치적 안방’인 광주와 ‘27년 텃밭’이던 서울 관악을에서 참패했다는 점이다. 광주는 새정치연합의 ‘심장’이었고, 관악을도 호남 출향민 거주 비율이 높아 ‘서울의 호남’으로 불려왔다. 새정치연합을 떠받쳐온 호남이란 지역 기반과 30~50대 초반 진보적 유권자층이란 양대 축 가운데 하나가 동요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대목이다.
[서울 = 김현태, 박정익기자] 호남의 동요를 드러내는 징후는 최근 5년간의 지역 선거 결과에서도 확인된 바다. 2010년 7월 광주 남구을 보궐선거에서 오병윤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가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선 무소속 단체장들이 전남에서 대거 당선됐다. 지난해 7·30 순천·곡성 보궐선거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새정치연합에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30일 오후, 이번 보궐선거 지역구였던 광주 금호동 인근에서 만난 유권자들 반응 역시 심상치 않았다. 금호사거리 인근에서 채소 노점을 하는 박향자(54)씨는 ‘변화’라는 말을 툭 던졌다. “그동안 ‘새정치’를 많이 찍었제. 근디 이번에는 그 냥반(천정배 후보)이 되아야 먼가 바까질 거란 생각이 듭디다.” 식당 주인 이아무개(55)씨는 “새정치연합에 본때를 보여줘 속이 다 시원하다”고 했고, 건설업자 장원호(40)씨는 “시민들 인식은 변하는데, 당만 보고 찍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라며 “‘민주당’이 정신 차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 서을 보궐선거에서 천정배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것은 새정치연합에 꺼낸 광주 유권자들의 ‘옐로카드’라는 것이다.
그 유권자들이 새정치연합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금호동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조상훈(57)씨는 “성완종 리스트라는 큰 사건이 터졌는데도 ‘민주당’이 한 석도 못 얻었잖나. (성 전 회장) 유서에 친박 측근이 8명이나 들어 있었는데도,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는 ‘깡다구’(결기)가 없었다”고 했다. 새정치연합의 공천 행태에 대해선 따끔하게 일침을 놨다. “지난 총선에서 광주 서갑 경선 나갈라다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와 떨어져분 사람을 여그다 공천하믄 쓰겄소?”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의 리더십엔 평가가 엇갈렸지만, 친노 인사들이 비공식 라인 형태로 주변에 포진돼 있는 등 계파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행태에 대해선 반감이 컸다. 문우근(65·광주 서구)씨는 “문 대표가 특별히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친노들’이 설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다”고 했다. 상무지구에서 만난 한 50대 남성은 “문재인은 노무현처럼 친근감이 없어 거리감이 느껴진다. 당 운영도 자기 사람 위주로 해서는 안 된다. 관악을도 인기 없는 친노 후보 세워 패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광주 지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공무원 임아무개(53)씨는 “광주 국회의원들은 선수가 쌓여가도 중앙정치 무대에서 존재감도 없고, 오로지 다음번 당선에만 관심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승용 전남대 교수는 이런 현지 민심을 “정치적 소외감의 분출”로 분석한다. 오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사후 호남을 대표할 만한 유력 정치인이 없다는 지역민들의 자괴감과 당 주류에 줄을 대 공천을 받고 지역에선 ‘왕’처럼 군림하는 지역 국회의원들의 행태에 대한 반감이 결합돼 선거 때마다 현역의원에 대한 물갈이 여론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실제 광주 지역의 현역의원 교체비율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높다. 문제는 초선 의원들에 대한 호감도 역시 높지 않다는 점이다. 광주 지역의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유권자들의 개혁성과 정치의식은 높은데, 중앙당이 공천한 국회의원들은 보수적인 관료 출신이나 존재감 없는 교수들이다. 유권자들과 정치적 교감이나 정서적 공감대가 생기기 힘든 구조”라고 했다.
옛 평화민주당 시절부터 이어진 ‘일당 독점 구도’에 대한 피로감도 상당하다. ‘공천이 곧 당선’으로 이어지는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지역 내 정치적 경쟁구도가 사라지고, 지역정치는 중앙정치의 하청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호남에서는 ‘토호-지방의원-국회의원’으로 이어지는 ‘지역정치의 토호정치화’, ‘식민화’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광주지역의 한 시민운동가는 “경쟁이 없다 보니, 지역민의 요구에 대한 반응성도 떨어지고, 정치인의 책임성도 약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200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세가 확장되고, 2013년 광주가 ‘안철수 신당’의 진원지가 된 것도 정체되고 타락한 지역 정치에 대한 피로와 반감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의 수권 능력에 대한 불신이 정치적 지지 철회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압도적 지지를 보내줬지만 주요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정국운영에서도 새누리당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양상을 보여주면서, 새정치연합을 밀어줘야 할 정치적 동기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호남의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를 잘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지역발전이라는 집단적 이익을 꾀하거나, 당의 주류가 호남이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친화성’ 때문에 새정치연합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오랜 차별로 인한 역사적 소외의식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집단 경험이, 정당이 표방하고 추구하는 가치와 호남 유권자 사이의 유대와 일체감을 만들고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새정치연합에 투사하게 만들었던 것”이라며 “하지만 새정치연합의 무능과 무기력, 정체성 상실이 점차 이런 일체감과 희망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영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세월호 문제나 특검법 등 이슈 때마다 새정치연합은 무능하게 대응했다. 천정배를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고, 시민들은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했을 뿐이다. 특히 광주지역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배지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앞으로 천 당선자의 행보를 주시할 것으로 보인다. 박구용 교수는 “새정치연합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 정치의 새판짜기에 나서달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천 당선자가 외면하고 대권 후보로 착각해 사심을 챙기기에 급급하면 냉혹하게 심판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습 나선 새정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30일 전날 치른 재보궐선거 참패에 대해 “이 시련을 약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선거 결과는 저희의 부족함에 대한 유권자들의 질책일 뿐,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정면돌파’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날 오후 열린 새정치연합의 비공개 의원총회에선 일부 의원이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도부 전원이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내 탓 네 탓 하기보다는 모두가 책임있는 모습으로 선거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과 해결책을 찾자’는 쪽으로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 선거 패배 수습 과정에서 또다시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다. 하지만 천정배 의원(무소속)의 당선으로 ‘호남 물갈이’ 필요성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들끓는 등 호남 의원들의 동요가 커지고 있어 향후 당내 친노-비노 간 계파 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패배는 총선·대선 예방주사”
문 대표 거듭 정면돌파 의지
의총서도 “수습 먼저” 공감대
지도부 책임 따지다간
분열하는 모습 비칠까 우려
“국민의 분노하는 민심을 대변하지 못해 송구하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저희의 부족함을 깊이 성찰하고 절체절명의 각오로 다시 시작하겠다. (이를 위해) 길게 보면서 더 크게 계획하고 더 크게 통합하겠다. 더 강하고, 더 유능한 정당이 되어 국민의 삶을 지키겠다. 이번 선거 결과는 저희의 부족함에 대한 유권자들의 질책일 뿐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민심을 호도하면서 불법 정치자금과 경선 및 대선자금 관련 부정부패를 덮으려 하거나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가로막으려고 한다면 우리 당은 야당답게 더욱 강력하고 단호하게 맞서 싸울 것이다.” 문 대표가 이날 국회에서 열린 고위정책회의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밝힌 선거 패배에 대한 입장이다.
과거 선거 패배 때마다 꺼내들었던 ‘지도부 총사퇴’ 카드 대신 ‘다른 방법’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문 대표는 이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그런 것(그만두는 것)보다는 당을 더 개혁하고 통합하고 단합시켜 국민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아서 잘하는 정당으로 만드는 것이 책임지는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당장 자신을 대체할 당내 대안세력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다, 지도부에만 선거 패배 책임을 돌리기 어렵지 않으냐는 판단 아래 정면돌파를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만일 이번 선거에서 이겼더라면 공천 개혁과 야권 단일화 등을 추진하기 더 어려워졌을 것”이라며 “이번 선거 패배는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 대비한 ‘예방주사’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문 대표가 ‘성완종 리스트’ 국면에서 여당을 상대로 철저한 진상규명에 나서는 한편, 당내 ‘혁신’과 야권의 ‘통합’을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란 의미다.
“이겨야 하는 선거를 졌다”(김한길 전 공동대표)거나 “공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박영선 전 비대위원장)는 불만들도 있지만, 전직 대표들 등 당의 ‘대주주들’은 일단 문 대표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자제했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 쪽에선 오히려 “당내 소모적 갈등이 재연되는 것을 막자”며 다음달 7일 원내대표 선출을 경선이 아닌 ‘합의 추대’로 치르자고 문 대표에게 먼저 제안하는 등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비노계(비노무현계) 의원들을 포함해 의원들 대다수 역시 문 대표의 이런 처방에 크게 토를 달지는 않는 분위기다. 박주선 의원이 광주 서구을 선거 결과를 놓고 “당의 핵심 기반인 호남인들이 새정치연합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며 “지도부 전원 사퇴 등 창당에 버금가는 특단의 조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지도부 사퇴를 얘기할 때가 아니다”(강창일·유대운·신기남 의원 등)라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대신 의원들은 “우리가 패배한 이유를 확실하게 진단해야 한다”(이개호 의원), “우리 당 지지 기반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는 대안을 찾자”(최민희 의원), “대국민·대호남 메시지가 필요하다”(박범계 의원)는 얘기들을 내놨다.
새정치연합의 한 당직자는 “선거 패배 이후 이처럼 큰 논란 없이 빨리 수습이 되는 건 처음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년 공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문 대표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어 문 대표 책임론은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