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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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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인심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21/03/30 23:06 수정 2021.03.30 23:08

도심(道心)은 무엇이고 인심(人心)은 어떤 것일까요? 인심은 감각적 욕구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며, 도심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말이 조금 어렵지요?

《서경(書經)》 <대우모편(大禹謨篇)>에 보면, 순(舜)이 우(禹)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微妙)하니 마음을 잘 살펴 하나가 되게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심이 위태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감각적 욕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심이 미묘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도덕적 본성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이 인심과 도심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구나 정일(精一)한 마음자세를 가짐으로써 도심을 잘 살펴서 키워나갈 수 있고, 인심이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심성수양의 결과로 ‘중(中)’의 상태, 즉 인욕(人欲)의 사(私)를 물리치고, 천리(天理)의 공(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적인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도심은 오직 천리(天理)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순선(純善)입니다. 하지만, 인심에는 천리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인욕에 따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심에는 ‘선 악’ 모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땅한 바를 따르면 그 역시 선(善)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의사가 처음에는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그것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게 되면 도심이 인심으로 바뀔 수 있으며, 또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한 바를 좇아 사욕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심이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도심을 일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아닌가요? 그래서 공자도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인격수양과 마음공부에 일생동안 매진하여, “70세에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은 그의 저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라는 책에서, “도심이 주재(主宰)가 되고 인심이 그 명(命)을 들어주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이것은 도심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법도에 넘지 않는다.[道心爲之主 而人心聽命 則從心所欲 爲從道心之所欲 故不踰矩]”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어, 도심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인심이 그대로 따라준다면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맞는 올바른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산은 하늘에서 받은 착한 성품대로 따를 수만 있다면 인간 마음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심과 도심의 조절이 무너지면서, 인심의 가장 큰 부분인 ‘물욕(物欲)’이 도심을 가로막아 인심을 따르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위기에 봉착한 오늘의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물질이 인간의 마음을 주재하면서 도심이 약화 되자, 기후˙자연, 코로나 19 같은 온갖 재앙이 물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이 외치신 것입니다. 물질이 발달되어 그 폐해가 하늘을 찌르는 만큼 우리의 정신도 함께 발전하지 않으면 어쩌면 이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도 종말을 고할지도 모릅니다. 그 정신을 개벽하자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수행하는 마음공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정신개벽을 외면하고, 물질만을 위해 이 도심을 외면하니 장차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을 런지요? 마음이 답답하고 조급해져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과학 공부의 반만이라도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도학공부를 자라나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그 마음공부를 어떻게 가르치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르치면 좋을까요? 그것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도덕과목>을 의무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한국 4대종교인 불교, 유교, 기독교(천주교), 원불교의 도덕공부를 가르치면 됩니다. 결국 이 모든 사태는 우리 인간이 도심을 버리고 물질에 현혹 되어 인심이 호도(糊塗)되어 생긴 일입니다.

마음공부란 우리들의 마음을 <요란하지 않게, 어리석지 않게, 그르지 않게> 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마음을 쓰는데 공자 같은 성인도 70년의 세월이 걸리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나이 80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직 마음이 혹중혹부중(或中或不中)입니다. 마음공부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평생을 닦아도 어려운 공부를 어찌 각종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지 걱정입니다. 우리 어서어서 도심과 인심이 하나 되는 마음공부에 매진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우리의 영생에 복락(福樂)을 구하면 어떨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3월 3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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