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출발점은 이탈리아였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가 첫발을 뗐다. 고대 그리스·로마를 문화의 절정기, 중세를 창조성 짓밟힌 암흑기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리스 고전 학문과 예술의 부흥 없이는 문명 부활과 사회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후 고전의 재해석이 파도를 타고 물결을 이뤘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사가 바자리는 『이탈리아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란 책에서 “고대 이후 쇠퇴했던 미술이 조토(이탈리아 화가)에 의해 부활했다”며 부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ascita)’를 썼다. 이어 18세기에 나온 프랑스 백과사전은 학문과 예술이 꽃핀 새로운 시대를 설명하면서 같은 뜻의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를 사용했다. 이후 르네상스는 세계 공용어가 됐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억울할 법도 하다. 재주는 자기들이 넘고 명예는 프랑스가 챙긴 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18세기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 프랑스였던 것을. 주먹이 곧 법이고 돈이 곧 도덕인 게 국제질서 아니던가.
우리가 이탈리아 걱정해줄 처지는 아니다. 유구하게 불려온 ‘동해’조차 자칫 ‘일본해’가 되게 생긴 판 아닌가. 국내에서 발행된 교재조차 일본해로 표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외국지도를 긁어 붙이다 생긴 해프닝인데 그만큼 국제사회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도 흥분하고 분노할 뿐 더 유구한 진리를 생각 안 하니 딱한 일이다. ‘힘이 곧 정의(Might is right)’인 국제사회의 변함없는 룰 말이다.
일본 총리의 이번 미국 방문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다. 미국과 일본이 가까워지고 한국만 고립됐다는 한탄이 쏟아진다. 우리 외교는 그동안 뭐했냐는 질책이 이어지고 좀 잘 하라는 주문이 쏟아진다. 다 맞는 말인데 뭘 어떻게 잘 하라는 건지는 집어내지 못한다. 외교 당국도 그렇지만 지적하는 사람도 뾰족한 수가 없는 까닭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이 강화되길 바란다. 미국의 비용 절감과 보통국가화를 원하는 일본의 이해가 딱 들어맞는다. 궁극적 목표인 대중국 견제까지 겹친다. 이런 지정학적 여건 속에서 미·일 동맹의 강화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필연이고 이미 상수(常數)가 됐다. 그걸 막아야 했다고? 우리 힘으로? 일본의 무장을 막으려면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대신할 만한 비용과 부담을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필요한 일일까?
필요한 일인지는 몰라도 가능한 일일 수는 있다. 하지만 기대하는 것처럼 외교만으론 안 된다. 힘을 키워야 한다. 군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제력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최근 사석에서 “연간 5%씩 10년만 경제성장을 해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 일본과 어깨를 견줄 만한 경제력을 갖고 싶다는 얘기다. 지난해 우리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8739달러다. 10년간 5%씩 성장하면 4만6000달러가 넘는다. 제로 성장에 가까운 일본의 3만7540달러를 추월하는 데는 6년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1인당 GDP만으로 힘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것만으로 일본을 넘어섰다고 하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정도 주머니는 채워놔야 일본이 지금처럼 막 나가지는 못할 거라는 얘기다. 지금처럼 사과를 구걸하고, 고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말이다. 외교역량도 따라 커진다.
물론 꿈 같은 일이다. 올해 당장 3% 성장이 될까 말까다. 지표로만 보면 일본보다 우리 경제가 더 걱정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느끼는 위기를 타계할 방법은 그것뿐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개혁들만 이뤄내면 꼭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걸 2002년 이미 경험했지 않나. 『회남자(淮南子)』가 지금 우리가 할 일을 말해준다. “못에서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느니 돌아가서 그물을 짜는 게 낫다(臨淵羨魚不如退而結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