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생명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세계적 생화학자 박상철 교수의 말이다. 박 교수는 ‘생명의 미학’에서 “생명현상의 근간을 이루는 생체분자들은 아름다운 질서와 변함없는 뜻, 서로 돕고, 전체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거듭나는 덕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분자들의 만남에는 따뜻한 정과 부드러운 어울림이 있다. 바로 이것이 생명의 뜻이고 의미이다. 내가 인간으로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다른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윤영(33)작가는 그 생명의 흔적들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생명의 울림일 것이다.
언 땅에서 움트는 새싹의 여림같은 생명은 이작가에게 영감이 되고 작품이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생명현상의 질서정연함을 차차 깨달으며 숨이 막히는 전율을 느꼈다는 노학자의 글이 나의 감성의 주머니가 흔들렸다. ‘생명을 이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다양한 분자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생명의 엄숙한 질서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워하고 반가워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분자들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바로 이것이 사람살이의 원형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 어우러져 이루는 세상의 모든 질서의 근원이 바로 생명의 질서에 있음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통찰은 큰스님의 법문처럼 다가왔다.”
삶, 죽음, 만남 그리고 이별 같은 인간의 생도 생명의 질서인 것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생체분자들은 필요한 반응 작용을 마치면 서로 헤어짐으로써 반응을 종결시키고 다음 생명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특정 부위의 세포는 조용히 이웃에 요란을 떨지 않고 사라져주어야 다음의 반응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사람살이에서도 만남의 소중함과 더불어 헤어짐(죽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엄숙한 질서가 이루어 놓은 생명세계의 멋은 ‘만남과 어울림’으로 수렴된다. 작가는 그것을 그린다.
작가의 작품에서 불투명한 중첩은 ‘만남과 어울림’의 형상화로 보여진다. 갤러리도올에서 열리는 개인전(4. 14 ~ 5. 2)에선 생기있는 색채와 리듬감 있는 붓질로 중첩한 16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붓질이 된 캔버스 화면에 비단을 한겹 덧붙여 작업을 한다. 여성의 속치마에 사용되는 비단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투명하기도 하고 불투명하기도 하다. 생명의 모습이 그렇다. 얇고 유약해 보이지만 굉장히 질긴 이중적이 특성이 있다. 유약하기도 하고 질긴 생명력을 닮았다.
“사는 일은 때때로 비천함이 따르지만, 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오랜 병마와 싸워 이겨낸 작가의 말이기에 뭉클하다. 작업은 색 위에 색, 면과 면이 만나 겹을 이룬다. 붓질의 흔적과 미묘하게 번지는 색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추상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공간에선 서서히 움직이는 미생물 같은 형상도 보인다.
이전 전시출품작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지난 1년여 시간 동안 서울의 집과 강원도 양구의 작업실(박수근미술관 레지던시)을 오가며 꾸준히 작업한 결과물이다.
“생명은 여전히 미지의 차원이다. 중첩의 틈새,겹 사이로 꿈틀거리는 생명의 흔적이라도 포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