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비대면 시대다. 창작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교류와 대화의 장이 극히 제한되면서 그것마저도 창작의 모티브로 삼는 작가들이 있다. 인사동 산촌갤러리 개관기념 초대전(14일~5월12일)을 갖는 왕열 작가도 어느날 마시던 술병을 친구삼아 취중진담을 나눴다.
“술병의 날렵한 곡선이 나의 붓선을 유혹했어요. 산천도 친구도 벗할 수 없는 시대에 술병이라도 위안을 삼자고 생각했지요. 그러자 술병이 어느새 화폭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작가의 신작 ‘취중’은 그렇게 탄생됐다. 언뜻보면 1획의 붓선이다. 하지만 찬찬이 들여다보면 술병의 윤곽을 감지할 수 있다.
이백의 시 “달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月下獨酌)‘를 떠올리게 된다. 이른바 혼술을 하며 시를 읊은 것이다. 왕열작가도 혼술중에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이백의 ’월하독작‘ 4수중에 첫째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혼술하는 시인이 달을 불러 벗하며, 달 그림자까지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이다.
”이백의 절창은 달을 불러 술을 마실정도로 절대고독의 시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작가는 정신적으로 외로워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대면 상황이 저에게 화심을 선사했습니다.“
작가는 이번 개관기념초대전에 무릉도원 시리즈 2021년 신작 40여점을 선보인다. 명상,동행,취중의 제목들이 붙은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새싹이나 신록의 초록들이다.
”강한 생명의 봄기운으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것이지요.“
작가는 그동안 풍경이 아니라 산수를 그렸다. 풍경화와 산수화가 자연을 소재로 삼는데는 동일하다. 하지만 회화에서 풍경은 자연의 부분을 하나의 대상으로 묘사하지만, 산수는 자연에 내포되고 스며든 가치나 관념이 대상으로 표현된다. ’무릉도원‘시리즈는 투사된 풍경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자연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이상화 해온 여망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물론 왕열의 산수는 전통산수화 시각에서 보면 분명 파격이라 할 수 있다. 화폭이 연극무대처럼 꾸며진다. 첩첩 겹쳐지고 펼쳐지는 산과 계곡 뿐만 아니라 말과 새도 무대장치처럼 놓여지고 있다.
”자연스레 필선보다 색면의 비중이 컸습니다.“
그의 최신작에선 색면의 바탕위에 필선이 강조되고 있다. 색면의 무대위에 필선이 주인공이 된 모습이다. 색면위에 형상을 채우기 보다는 붓의 스트로크나 제스추어가 몹시 두드러져서 필이 면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필 그 자체가 오브제화 하기에 이르렀다. 운필의 기운이 형상을 짐작케 해준다.
”우리는 인식된 사물들의 감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카테고리라는 상자속에 갇힌 새들이지요. 상상력만이 우리의 오관에 그것을 깰 수 있는 망치를 선물해 줍니다.“
우리가 최상급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재적인 것을 떠나 상상적인 것에 이르러야 하는 이치라 하겠다.
예술가들이 가야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