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 선생은 왜 33세에 요절했을까
어린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날, '어린이날'은 매년 5월마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어린이날의 아버지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서울= 연합통신넷, 안데레사기자] 소파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상인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시절을 보내다 집안의 사업실패로 부침을 겪기도 한 그는 1917년 천도교의 제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과 결혼해 손병희의 권유로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20년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에 번역동시 '어린이노래-불켜는 아이'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방정환 선생은 본격적으로 어린이라는 용어 보급에 나섰다. 이듬해에는 22살의 나이로 천도교소년회를 만드는 한편 1년 뒤인 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을 정하고 그 취지를 담은 각종 인쇄물을 통해 선전을 진행했다. 일부에는 1923년 5월 1일이 최초의 어린이날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천도교소년회가 처음 시작한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전국 규모로 확산시키기 위해 조직된 '조선소년운동협회'와 함께 진행한 행사의 영향으로, 1922년 5월 1일을 최초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방정환 선생은 또한 1923년 3월 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다. 창간 직후에는 보름에 1회꼴 발행을 목표로 했으나 곧 월간체제로 전환된 '어린이'는 아이들을 위한 내용과 편집으로 발간 초기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요와 동화가 큰 사랑을 받았는데 동요 '고향의 봄', 동시 '까치까치 설날', 동화 '호랑이와 곶감' 등의 인기에 힘입어 아동문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고한승, 윤극영, 이원수 등 1세대 아동작가들의 활약으로 아동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
같은해 5월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한 방정환 선생은 이후 스트레스성 고혈압으로 쓰러져 요절할 때까지 어린이를 '올려다 본' 진정한 어린이 운동가였다는 평이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 남긴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은 아직까지도 그의 깊은 어린이 사랑정신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정용서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연구교수는 방정환 선생에 대해 "어린이를 미래 주체로 발굴하고 의식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이라며 "아동 인권을 실체로 이끌어 낸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고 평했다.
또한 "기획, 편집, 활동 등 다채로운 능력을 뽐냈던 재주꾼"이라며 "동화구연을 할 때면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달변가이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