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속에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 고영훈 작가의 작업을 떠올리게 해준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환영과 재현이 아닌 원본의 실재(實在)를 말하고 있다.
실재와 재현의 이분법이 점차 무의미해 지고 있는 시대다. 초연결-초실감 디지털 세계인 ‘메타버스’(Meta+Universe)가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공간 위에 가상 정보를 겹쳐 영상 하나로 보여주는 증강현실, 현실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가상현실(VR), 두 기술을 접목한 혼합현실(MR)과 더불어 확장현실(XR)까지 실재와 재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환영의 표현 방법을 근간으로 하는 나의 작업은 2002년을 전후해서 확장된 변화로 이어진다. 이전에는 이원적 사고에 의한 현실의 대립적 관점에서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 이후 근원을 찾아가는데 불이(不二)적인 세계 속에서 전일적 사고를 우선 전제하였다. 관계와 변화의 장 속에서 에너지(氣)의 바다 위에 드러나고 사라지는 직관적인 마음의 상(像)들을 관조적 태도로 응시하고자 했다. 변역(變易)의 물결 위에 떠 있는 세상의 존재들을 내 인식판(캔버스) 위에 명상적 통찰로 모색하고자 한다.”
칸트의 코페루니쿠스적 대전환을 보는 듯하다. 대상에서 주체로의 전환이다. 적어도 화면과 공간 사이, 환영과 실재 사이, 그리고 정신과 물질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려는 중용(中庸)의 미적가치를 엿보게 해준다.
3개의 달항아리가 포개진 작품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질이나 에너지의 기본단위인 양자수준에서는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교환될 수 있다. 더욱이 미시체계의 존재의 실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실험에서 전자를 관측하는 순간에 그것은 입자이지만 관측을 중단하자마자 전자는 확률파처럼 행동한다. 즉 측정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실재가 부분적으로 관측자에 의해 창조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가 바로 고전적 실재관이 무너지는 지점이다. 사물들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다.
“현대물리학에서 양자의 중첩성을 이야기한다. 여러 가지 값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전자의 경우엔 흘러보낼 때와 닫을 때 1과0이 되지만 양자에선 그냥 1과0을 같이 가질 수 있다. 양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얽힘이다. 과거 상호작용했던 입자가 서로 멀리 떨어진 뒤에도 연결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중첩과 얽힘은 고성능 연산과 전송이 가능한 양자컴퓨터의 원리이기도 하다. 있음(1)도 없음(0)도 하나로 아우르는 불이(不二)의 세계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세 개의 달항아리는 다양한 값을 가질 수 있는 달항아리의 모습이다. 작가는 과거에 보았던 국보급 달항아리에서 주둥이 몸통 빛깔 자태 등을 마음에 담아왔다.
“결국 나의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도공이 되어 마음으로 만들어 이미지로 그린다고 하겠다. 결국 온통 내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그는 향후 자신의 마음의 달항아리가 시간속에서 진화해 가는 다중성을 화폭에 담겠다고 했다. 극사실기법이지만 단순 극사실회화가 아닌 존재론적 회화로 승화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존재의 관조(觀照)다
작가는 그동안 콜라주한 책의 페이지 위에 극사실적인 묘사로 돌을 그리거니 꽃을 그렸다. 이후 도자를 주제로 회화를 구성했다. 분청사기에서부터 달항아리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도자가 등장한다. 가나아트 나인원과 사운즈한남에서 9일까지 열리는 고영훈 ‘관조’전은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고영훈 작가는 1970년대 초반부터 군화, 청바지, 코트, 코카콜라 등의 일상적인 사물을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냈다. 대중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소재인 코카콜라나 노동자 계층을 연상시키는 구겨진 군화의 모습은 당대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앙데팡당(Indépendant)’전에 ‘This is a Stone ’을 출품하며 일대기적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아래에 쓰인 문구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정면으로 반박하듯, 사실적인 돌의 이미지를 그리곤 그것을 돌이라 지칭했다. 이는 사실적인 묘사일지라도 그것은 대상의 재현일 뿐, 실재는 될 수 없다는 마그리트의 대전제에 대한 반박이자 그가 일생에 거쳐 천착한 화두의 탄생이었다. 마그리트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통해 회화의 종말을 단언했다면, 고영훈은 “이것은 돌이다”라는 명제로써 회화에 있어서의 환영의 권위를 재정립하고 그 복권을 주창한 것이다.
‘예술은 재현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실재인가’라는 현대미술에서의 딜레마를 짚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당대 한국 미술계에서 시도되었던 개념미술과도 궤를 같이 한다.
작가는 정안수 그릇을 통해 신과 연결되는 정신세계로의 창문을 열어 놓기 시작했다. 달항아리도 생활권에서 신성시 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창구로의 진입을 위한 대상이 됐다.최근들어서 하얀 배경도 지금 바로 여기라는 현실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연결시키는 여백이 되고 있다. ‘있음’을 만들어 내는 시공적 에너지(氣)가 가득한 ‘없음’이다.
“있음과 없음은 불이(不二)다. 인간인식의 한계로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다만 예술 그리고 정신적 관조와 직관이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준다.”
작가의 캔버스 옆면이 특이하다. 돌가루 글씨가 새겨져 있어 돌판을 연상시킨다. 인간 인식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형상화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