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의 대선자금 필요를 키운 것은 역설적으로 ‘돈 문제’를 극도로 멀리하는 박 후보의 ‘결벽증적 태도’도 한몫했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는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도 확인됐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치열하게 붙으면서 박 후보 캠프는 ‘실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감히 후보에게 돈 문제는 꺼내지 못했다. ‘친박 좌장’ 김무성 대표가 서울 삼성동 자택을 파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자 박 후보가 “제가 언제 돈 쓰라고 했어요?”라며 일언지하에 잘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12년 경선 캠프에서도 한 친박 핵심 의원이 경비에 관한 말을 꺼냈다가 박 후보로부터 단칼에 제지를 당했다.
성 전 회장이 밝힌 대로 ‘회계처리’되지 않은 돈이 대선판에서 흘러갈 곳은 결국 그 돈을 필요로 하는 곳일 가능성이 높다. 2012년 대선 캠프에서 조직총괄본부장을 지낸 홍문종 의원은 지난달 11일 기자회견에서 금품 수수 의혹 관련 결백을 주장하며 “조직총괄본부에 소속된 (인원) 60만명, 상근직원 200여명”이라고 규모를 언급했다. 역설적으로 그만한 매머드급 인력을 움직이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60만명이 5000원짜리 짜장면 한 그릇씩만 먹어도 30억원”이라는 계산이 그것이다. 성 전 회장 메모에 거명된 당시 유정복 직능총괄본부장에게도 의혹이 쏠린다. 당시 ‘직능’에서만 약 100만장의 임명장을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선대위 관계자들은 “임명장 1장당 1500원이라고 하면 제작비만 15억원”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백락(伯樂, 춘추시대 말을 잘 알아보던 상마가相馬家)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 한유(韓愈), <잡설>(雜說)
국무총리가 5번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3명 낙마 2명 사퇴다. 인재를 보는 혜안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인재가 없는 걸까?
인재를 선별하는 기준이 당파를 중심으로 하는 방식이라면 진정 현덕(賢德)한 이는 자리를 잃게 되고, 군주는 충직한 관리를 가까이 둘 수 없다. 공이 없는데도 '라인'을 통해 등용된 사람이 '안락'을 누린다면 이 또한 나라가 망하는 근원이 되며, 백성은 위정자를 외면할 것이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어떻게 하면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는가?"라고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곧은 자를 들어 굽은 자 위에 놓으면 백성이 따를 것입니다"(<논어·위정> (論語·爲政))라고 대답했다. 치세이든 난세이든 국가의 안위는 언제나 '사람'이 답이다.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머리를 감다가도 중단하고 밥을 먹다가도 뱉어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악발토포, 握髮吐哺)는 주공(周公)의 노력까지는 아닐지라도 신중 또 신중을 기할 일이다.
그렇다면, '외로운' 군주는 인재를 등용할 때, 무엇을 귀담아들어야 하는가? 맹자는 반드시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러고도 신중 또 신중을 거듭한 후 단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좌우 신하들이 모두 현자라고 말해도 아직 안 되며, 여러 대부들이 모두 현자라고 말해도 아직 안 되며, 백성들이 모두 현자라고 말하면 그 후에 가서 정말 현자인지를 잘 살핀 후에 등용해야 합니다. 좌우 신하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해도 듣지 말며, 백성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하면 그 후에 잘 살핀 후 정말 안 되는지를 본 후에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맹자·양혜왕 하>(孟子·梁惠王 下)). 왜냐하면 "저 하늘은 아득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백성의 눈을 통하여 보고 백성들의 귀를 통하여 들으며, 그리하여 천명(天命)을 내려주기도 하고 천명을 거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경>(書經))
그래서 일찍이 한비자(韓非子)는 군주를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하군(下君)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중군(中君)은 남의 힘을 사용하며, 상군(上君)은 남의 능력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아랫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잘 사용하여 최상의 군주가 되려면 먼저 인재등용에 신중 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 백성의 고충을 중국 고대에서는 음악을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다. 음악을 정치의 득실과 인재 등용의 성패를 가늠하는 척도로 본 것이다. "그 음악을 들으면 정치를 안다(문기락지기정聞其樂知其政)", "음악과 정치는 통한다(악여정통의, 樂與政通矣)"라는 말처럼 정치와 음악의 상관성을 짐작게 한다.
예를 들어, 오(吳)나라 계찰(季札)은 오나라 왕위를 마다하고 왕의 사신이 되어 노(魯)나라를 방문했다. 노나라에서 음악을 듣고 품평하는 장면을 '계찰관악'(季札觀樂)이라 부른다. 그는 <시경>(詩經)에 실린 다양한 지역의 음악을 듣고 그 지역의 민풍을 그대로 읽어낸다. 먼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들려주자 "아름답습니다.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으니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백성들은 근면하고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목소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정풍(鄭風)을 들은 후에는 "정서가 매우 쇠약하게 들리니 백성의 힘겨운 삶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일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패풍(風)·용풍(風)·위풍(衛風)의 음악을 들려주자 "아름답습니다. 음조가 깊어서 우수가 느껴지지만 곤궁하지는 않은 듯합니다"라고 품평했다.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음악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감성과 시대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잘 다스려진 시대의 음악은 편안하고도 즐거우니, 그 정치가 화평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시대의 음악은 원망과 분노에 차있으니, 그 정치가 도리에서 어긋났기 때문이다. 망국의 음악은 슬프고 애달프니, 그 백성이 곤궁하기 때문이다. 음악의 도는 정치와 통하는 것이다"(<예기>(禮記)·<악기>(樂記))라고 말했다.
본래 음악이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만큼, 그 정서와 느낌에 따라 다양한 음악이 나온다. 한 시대의 정치와 사회 변화는 인간의 심리와 정서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하에 치세의 음악·난세의 음악·망국의 음악으로 나누어 정치의 득실과 민심을 파악한 것이다. 슬픈 리듬(가사)의 음악을 망국의 음악으로 보았고, 원망과 분노의 리듬(가사)을 난세의 음악으로, 편안하고 화락한 리듬(가사)을 치세의 음악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음악은 그대로 백성들의 정서와 지역의 풍습에서 드러났으며, 정치 득실과 인재등용의 결과라고 인식하였다.
우리에게도 시대의 정서를 노래한 음악들이 있다. <황성옛터>는 1928년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滿月臺)에서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며, <울밑에 선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민중의 정서를 대변했고, 70년대 통기타 노래, 80년대 운동권 노래 등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민중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와 음악은 일견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 고대인들은 음악이 곧 정치이고 정치가 곧 음악이라고 생각해왔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인사가 참사'인 시대이다. "재능 있는 자가 가려진 채로 있게 해서는 안 되지만(능자불가폐能者不可弊)", "이름이 높다는 것만으로 임용해서도 안 된다(예자불능진譽者不能進)"(<한비자·유도>(韓非子·有度)). 이는 위정자가 '치세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권력욕에 지배되지 않는 지도자와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인재가 한 나라의 치세를 이루어 갈 때, 우리의 정서와 음악은 화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천리마와 백락'의 효과일 것이고, 그러한 지도자만이 음악(백성의 목소리)을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박영순 교수는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