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공식행사에서 노래 한곡 함께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그것도 수많은 세월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불러온 노래인데 말입니다.
올해로 벌써 7년째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은 5·18 기념식 본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지 여부는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6일에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가 마지막으로 청와대를 찾아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을 한다고 하니 기대해 볼만도 하지만, 이런 논란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래 하나가 만든 논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5·18 기념식을 주관한 2003년부터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까지 제창됐습니다.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불렀습니다. 그러나 2009~2010년 기념식 공식 식순에서 빠졌고, 2011~2014년에는 무대에서 합창단만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2010년 30주년 기념식에서는 난데없이 ‘방아타령’이 공연 순서에 들어가 있다가 논란 끝에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2013년까지는 합창 순서에 야당 의원들과 5·18 단체 회원들이 모두 일어나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제창 형식을 ‘억지로’ 갖췄지만 지난해에는 이들이 불참하면서 제창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중단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식 기념곡’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도 간단합니다.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하면 됩니다. 그러나 5·18 기념식을 주관하는 보훈처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2013년 6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특정 세력이 이 노래를 애국가 대신 부르기 때문에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2013년 6월에는 여·야가 합의해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공식 기념곡 지적 촉구 결의안’까지 통과시켰지만 박 처장은 요지부동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뭐기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어떤 노래이기에 보훈처가 이토록 반대하는 것일까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소설가 황석영씨와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씨 등 광주지역 문화운동패 10여명이 만든 노래극(뮤지컬) ‘넋풀이’에 삽입된 노래 중 하나라고 합니다. ‘넋풀이’는 5·18 민주화운동 중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씨와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숨진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공연으로, 마지막 합창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옵니다.
곡은 김씨가 1981년 5월 광주에 있는 황석영씨의 자택에서 썼고, 가사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12월에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젊은 남녁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일부를 차용해 황씨가 붙였습니다.
카세트 테이프 복사본, 악보 필사본, 구전을 통해 이른바 ‘민중가요’로 빠르게 유포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느새 5·18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재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3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아픔을 노래하면서도 진정성과 힘이 느껴지는 장중한 행진곡이 되게끔 장조가 아닌 단조를 택했다”며 “민주와 자유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분들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요, 그들 속에서 피어난 사랑에 대한 ‘찬사’이며, 미래에 올 수 있는 불의에 대한 우리의 ‘각오’”라고 곡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보수단체들은 “원곡은 북한에서 제작한 5.18 모략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이며 작사자는 국보법위반으로 복역한 월북, 반체제 인사다“란 이유로 북한과의 연계성을 주장합니다. 오랫동안 5·18 기념식에서 불러온 노래에 ‘종북’ 딱지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는 1991년에 제작됐다고 합니다.
■보훈처장 박승춘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의 중심에는 박승춘 보훈처장이 있습니다. 박 처장은 보훈처 안팎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2011년 2월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된 박처장은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에서도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장·차관급 기관장으로는 유일합니다.
업무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 처장이 부임한 2011년 정부업무평가에서 보훈처는 전체 기준 ‘보통’의 평가를 받았고, 정책관리역량 부분에선 방위사업청과 함께 ‘미흡’ 판정을 받았습니다. 2012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훈처는 전체적으로 ‘보통’ 평가를 받았지만, 정책관리역량 부분에서 문화재청, 법제처와 함께 ‘미흡’ 판정을 받았습니다. 차관급 기관 중 연달아 ‘미흡’ 판정을 받은 기관은 보훈처 뿐입니다.
박 처장은 재임 중에 많은 논란도 일으켰습니다. 2011년 8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2013년 1월 중앙보훈회관에서 열린 호국보훈단체연합회 신년교례회에서 “국방부는 군사대결 업무를 하지만 이념대결 업무를 어디서 하냐”며 “제가 2년 동안 보훈처가 국민의 안보의식을 함양시켜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보훈 정책을 추진하는 업무를 했는데, 보훈처가 이 업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라고 말한 사살이 알려져 비판을 받았습니다.
2012년 1월에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신년교례회’에서 “금년은 대한민국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해”라며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모이신 우리 애국 국민들이 단결하고 단합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2012년에는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박 처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같은달 서울 가락호텔에서 열린 국제외교안보포럼 신년하례식 조찬강연에서는 “금년에 우리 국민이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남북공조를 중시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여기에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2011년 보훈처가 제작한 교육용 DVD ‘호국과 보훈’에는 “야당 정치인들과 좌파 및 종북주의자들은 북한 도발을 현 정부가 지난 정부의 대북 정책을 따르지 않은 결과라고 주장”, “대한민국 내 반미감정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최고조” 등 야당을 종북세력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있지만 그의 자리는 철옹성같이 굳건 합니다.
육사 27기 출신으로 3성장군을 지낸 박 처장은 전역 직후인 2005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7년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하는 등 일찌감치 정치판에 몸을 담았습니다. 군에서는 전투정보과장, 군사정보부장, 합참 정보본부장 등 정보분야 요직을 거쳤습니다.
■결국 박 대통령이 해결해야 하나
국가보훈처의 태도가 올해에도 변함이 없자 5·18 단체들은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제35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지난달 30일 광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월6일 청와대를 공식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하고 공식 기념곡 지정과 국가기념식 제창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행사위는 “대통령 면담이 무산되거나 올해 5·18 기념식 식순에도 행진곡 제창이 포함되지 않을 경우 행사위와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등은 기념식 보이콧을 포함해 강력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2013년 6월27일 여야 국회의원 158명의 찬성으로 5·18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며 “정부가 이를 거부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고 5·18의 가치를 왜곡·부정하는 처사”라고도 말했습니다.
노래 한 곡을 두고 불필요한 논란이 이어진 것이 벌써 7년입니다. 주무부처 수장인 박승춘 보훈처장이 국회의 요구도 무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안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 대통령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참고로 지난해 5·18 기념식의 공식 슬로건은 ‘5.18 정신으로 국민 화합 꽃 피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