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덴마크의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1975~)’의 <절제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책의 17페이지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끊임없이 욕망에 대한 갈증을 유발하며 자원을 고갈하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지속해서 번영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절제와 자기 통제가 꼭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절제는 물론이고, 사회, 국가, 그리고 세계가 모두 절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절제의 기술> 다섯 가지는 이렇습니다.
1) <선택지 줄이기> 내 삶의 한계에 대해 깨달을 심리적 준비.
2) <진짜 원하는 것 하나만 바라기> 많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실존적 이유.
3) <기뻐하고 감사하기> 경제학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윤리적 가능성.
4) <단순하게 살기>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한 정치적 결정.
5) <기쁜 마음으로 뒤처지기> 일상이 즐거워지는 미학적 형식.
그런데 일찍이 우리의 성현들은 ‘즐거움도 슬픔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논어(論語)》를 읽다 보면 어떨 때는 희열이 끓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송(宋)나라의 정자(程子)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손과 발로 춤추고 뜀뛰는 지경에 이른다(不知 手之舞之 足之蹈之)”라고 말하였지요.
《논어》 <팔일(八佾)편>에, “관저는 한없이 즐거우면서 음(淫)하지 않고, 슬프기 그지없지만 상(傷)하지 않는다(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라는 말이 나옵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애정은 한없이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즐거움이 지나쳐 그 적당함을 잃어버릴 때가 ‘음’이라고 주자(朱子)는 해석합니다.
또 주자는 슬픔이 지나쳐 ‘화락(和樂)’한 마음에 해로움을 주는 것을 ‘상’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다산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의 해석에 따르면, “다산(茶山)은 주자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약간 다른 뉘앙스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즐겁고 기쁜 순간에도 경(敬)을 잊지 않음이 ‘음’ 하지 않음이라 하고,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도 깊게 속상해하지 않음이 ‘상’하지 않음의 뜻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不忘其敬 不永傷害)
박석무 이사장은 주자와 다산이 해석은 큰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주자의 해석에도 화락하면서도 공경(恭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으니, 같은 의미로 보아도 크게 틀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공자의 높은 안목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깊은 의미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이 남녀 간의 사랑과 애정입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기쁨이 조금이라도 지나쳐버리면 ‘음’에 이르러 그 남녀는 삶의 파탄에 빠져버리기 십상입니다. 인간의 성욕이야 본능이지요. 본능을 제대로 억제할 수 있어야만 행복의 문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면 당연히 파탄에 이르고 마는 것이지요.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슬픔은 인간의 감정을 순화해주는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화락한 심성에 상처를 주어 파멸에 이르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어》에 나오는 ‘관저’란 《시경(試經)》의 ‘편(編)’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시(詩)’라는 예술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비단 시라는 예술에서만이 아닙니다. 모든 예술이 즐거움과 슬픔에 대한 표현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켜주는 것이 그 근본적인 뜻입니다. 당연히 공자의 말씀은 모든 예술 분야가 도달해야 할 경지를 말해 준 것이지요.
공자의 말씀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과도 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결과적으로 같아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지나침도 안 되지만, 미치지 못함도 안 된다는 뜻이지요. 세상만사가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남을 미워할 수야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저주하고 증오해서 자신의 쾌감만 즐기다가는 파탄에 이르고 맙니다.
그럼 또 ‘즐거움의 정도(正道)’란 무엇일까요? 슬픔의 정도는 높은 인격의 수양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를 미학(美學)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절제는 아름답습니다. 마지막까지 모든 진액을 쏟아 내거나 혹은 쾌락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후퇴합니다. 욕망의 분출을 억제합니다. 그리고 음식의 욕구도 자제하지요. 절제 후에 다가오는 안정과 평화로움은 경험해보지 않고선 모릅니다. 하루의 삶이 다가 아닙니다. 내일엔 또다시 내일의 해는 떠오릅니다.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돌고 돕니다.
만물은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순환하며 자연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균형과 절제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 삶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늙어 감을 안타까워하고 좌절할 일이 아닙니다. 늙음을 받아들이고 생(生)을 관조(觀照)해야 합니다. 그것이 절제의 미학입니다.
그러면 남은 삶이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며, 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과 갈등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생사일여(生死一如)입니다. 우리 생사는 진리에 맡기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 이것이 절제의 최고 봉으로 미학이 되지않을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5월 2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