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한국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사회

한국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기자 입력 2015/05/07 10:32

우리들은 거대한 변화가 일고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급변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기업이나 모든 조직들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 때문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도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해나가야 한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뿐만 아니라 많은 기관들과 조직체들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학교 병원 대학 봉사기관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파간의 경쟁과 대립, 성장과 업적주의의 옛 패러다임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 술은 마련돼 있는데 새 술을 담을 그릇이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낡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던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패러다임 변혁운동은 성전체제의 정화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바리새, 에세네, 열심당 운동 등과는 달리 세계변혁운동의 목표를 권력구조의 개혁이나 사회경제구조의 변혁에 두지 않고 성전체제의 정화에 두었다. 이 같은 예수의 개혁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살롬이 파괴된 근본적인 원인을 하나님을 섬겨야 할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굴로 변질된 데서 보았던 것 같다.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참된 정의와 자유를 보장하는 평화를 이루는 첩경이라고 여겼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서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완공하기 위해 헤롯에게 온갖 아첨을 다 떨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물질공세를 통한 정치목적과 종교목적이 혼합된 타락의 온상이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극에 달한 대제사장 세습과 유대교의 교권주의는 잘못된 권력구조와 상업주의로 나아간 나머지 진정한 예배는 온데 간데 없고 형식주의에 빠졌던 것이다.


예수의 성전정화운동은 종국에는 정치·경제·종교·사회를 움직이는 특권층의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또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이어진 이스라엘 민중들의 대변혁운동으로 발전돼 낡은 권력구조와 사회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가 이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할 교회들이 이 세속 세계의 권력과 결탁하고 상업주의의 온상이 돼 버린 데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회복하신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교회에 침투한 세상 가치와 맘몬의 지배를 물리치고 성장주의와 공적주의로 얼룩진 과거의 낡은 모습을 청산해야 한다.


종교 개혁은 부패한 교회, 경직된 종교, 변질된 신앙을 썩지 않고 부드럽게 열린 종교, 영원토록 변치 않는 신앙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구조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교권주의의 틀을 지양하고 전문영역과 전문성을 중심하는 선교구조로 개혁돼야 한다. 둘째,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개혁 운동을 통해 딱딱하게 굳어진 구조를 열린 구조로 바꿔 가야 한다. 셋째,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구조를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넷째 성장에서 사회 섬김으로 교회구조를 바꿔가야 한다. 다섯째,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연합기구 탄생을 통해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 기독교의 위상을 높여가야 한다.


추운 겨울밤 넓고 큰그릇에 고슴도치 떼를 담아 밖에 내어놓았다. 영하 20도 혹한 속에 찬바람이 불어오자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몰려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따뜻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마다의 침이 상대방을 찌르자 아파오기 시작한다. 피를 흘린다. 고슴도치들은 아파서 흩어지기 시작한다. 흩어지면 춥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날이 밝아왔다. 아침에 나가 보았더니 다 죽어 있었다. 절반은 얼어서 죽었고 절반은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공동체들이 급속히 깨어져 가고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마다 혼자 살아가겠다고 한다. 내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그립다. 용서와 용납의 자리가 그립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교제의 자리가 그립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 아쉽고 외로워서 모여 본다. 서로들 의지해 본다. 그런데 공동체가 연습이 안되어 있기에 갈등을 느끼고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를 극복할 줄 모른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흩어져간다. 흩어지면 다시 외로움을 느낀다. 춥다. 추위에 떨어 본다. 세상이 혹독하기만 하다. 공동체가 그립다. 은혜의 자리가 그립다. 다시 몰려온다. 그러나, 몰려와서는 또 상처를 주고받는다. 증오심만 키워간다.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 교회 문을 열고 보았더니 절반은 피를 너무 흘려 죽어있고 절반은 추위에 얼어서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받고 사랑 나눌 공동체가 없어서, 상처가 치유되고 쓰러진 자아가 회복될 삶의 자리가 없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벅찬 감격과 은혜를 경험할 자리가 없어서 부둥켜안고 씨름하다 죽어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면류관 쓰는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프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받은 은혜와 감격을 나누기 위해, 받은 상처와 약점을 내어놓고 회복하며 치유받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수고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음을 인해 아프기만 하다. 오히려 저마다 썩을 세상만을 위하여 일하고 살았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웠던 영광스러운 성도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저마다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추위에 떨고만 있는 것이다.


참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바로 한가족이요 함께 삶을 나눈 하나된 공동체였다. 로마의 창칼과 핍박, 콜로세움과 십자가에서의 순교 앞에서도 성도들은 매일 카타콤에서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대그룹으로 함께 모여 주님의 피와 살을 나누며 감격하고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치유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 불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였다’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공동체,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일을 감당할 동역자들, 성도들, 교회를 찾고 계신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