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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전도몽상..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전도몽상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12/27 11:06 수정 2017.12.28 04:26

전도몽상

▲ 김덕권 칼럼니스트

전도몽상(顚到夢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로 ‘전도’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또 ‘몽상’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함이지요.

예를 들어 어두운 밤중에 뱀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가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와보니 새끼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뱀이 아니라 새끼줄인 것을 밝게 깨쳐 알고 난 다음에야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이 바로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여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괴로움 등의 온갖 감정들은 이런 전도된 몽상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현실 그 자체가 괴로움이거나 두려움은 아닌데, 다만 우리의 마음이 잘못 착각을 일으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하나 더 들어 볼까요?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며 힘겹게 살아갑니다. 행복이란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가족이 화목하며, 이 몸을 좀 더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도 바로 행복의 추구가 그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돈을 얻기 위해 남편, 아내, 혹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살해하거나 스스로 발목을 잘라 보험금을 받으려고 애쓰는 등의 비윤리적인 방법을 행하는 대담한 사람들이 매스컴에 많이 등장합니다. 이 얼마나 전도된 행복의 추구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 몸이 올바로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 할 것입니다.

용수(龍樹 : 150?~250?)가 저술한 불교 논서 또는 주석서인《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크게 ‘네 가지 전도(四顚倒)’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 가운데서 깨끗하다[淨] 하는 뒤바뀜이 있고, 괴로운 것[苦] 가운데서 즐겁다[樂] 하는 뒤바뀜이 있으며, 항상 함이 없는 것[無常] 가운데서 항상 함이 있다[常]고 하는 뒤바뀜이 있고, ‘나’라는 것이 없는 것[無我]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있다[我]는 뒤바뀜이 있다.」

이 네 가지 뒤바뀜으로 인해 어리석은 중생들이 미혹(迷惑)된 세계의 참모습을 올바로 보지[正見] 못하고, 잘못 본 전도된 모습을 진실로 착각하여 그 곳에 집착을 하게 되기 때문에 괴로움, 두려움 등의 망심(妄心)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정(不淨) 가운데서 정(淨)이라고 생각하는 뒤바뀜에 대해서는, 반대로 정(淨) 가운데 부정(不淨)이라고 하는 뒤바뀜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앞서 언급하였던 부정의 논리인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의미로까지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잘못된 네 가지 전도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인에게 집착해 사랑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때, 한없는 괴로움에 빠져 들게도 됩니다. 여인에 대해 깨끗하다는 감정이 있기에, 손도 잡고, 안아보고도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 라는 낙(樂)의 감정이 있기에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사랑이, 이 여인이 항상 함께할 것처럼 느끼기에, 멸(滅)했을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내 마음이 실제로 존재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 마음을 일으키는 내 몸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집착하기에, 아집(我執)으로 인한 괴로움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空)의 세계에서 보면, 깨끗하고 더럽다는 분별, 괴롭고 즐겁다는 분별, 항상 하고 단멸한다는 분별, 내가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은 잘못 전도된 몽상일 뿐, 결코 고정된 것들이 아닙니다. 여인의 겉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살가죽이 좋은 인연을 만나 잘 생겨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본래 깨끗하다(淨) 더럽다(不淨)라는 분별은 다만 전도된 생각일 뿐입니다. 고(苦)와 락(樂)도 마찬가지입니다. 떳떳함(常)과 무상(無常) 그리고 아(我), 무아(無我)의 분별도 엄격히 말하면 우리들의 잘못 전도된 허망한 분별심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전도된 분별망상들에 빠지고 집착하면 괴로움이며 불행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러한 분별망상을 여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현상에 대해 전도된 몽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수행인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핵심은, 일체의 모든 현상계가 공임을 올바로 조견(照見)하여, 전도된 몽상을 일으키는 공상(空相)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수행체계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공인 일체의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놓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내려놓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집착을 놓는 것이 바로 공의 적극적인 생활 실천이며,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실천인 것입니다.

물질을 우대하여 주객이 바뀌게 되는 세상은 언제나 정신적 가치가 하락하고 겉으로 보여주는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돈은 사람을 위해 만들었는데 돈에 집착하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 많은 재산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번뇌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갖는 잘못된 견해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눈앞의 모든 현상이 결국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인데도 영원불멸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살이가 괴로움보다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셋째, 나라고 하는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뿌리는 바로 전도몽상입니다. 즉, 집착과 욕심입니다. 우리 전도몽상에서 깨어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히 가져야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2월 2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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