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작업실로 내려가 앞치마를 허리에 질끈 묶으며 어제 펼쳐놓은 미완의 작업들을 훑어본다. 하얀색 붓질이 8회 정도 칠해진 곡면이 약간 아쉬워 보인다. 그래 하얀색을 완성하자! 12센치의 붓을 물에 담궈 붓결을 모아주고 개수대 위에서 붓을 세게 휘둘러 물을 빼낸다. 촉촉한 붓을 하얀색 물감이 알맞게 개어있는 물감 통에 넣어 여러 차례 담금질을 하고, 붓결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후우욱…숨을 가늘게 내쉬며 붓을 미끄러뜨린다. 몸은 하나의 축이 되고 팔은 넓게 호를 그리며 붓을 지지할 뿐이다. 물감을 올리는 행위가 시작되면 와글와글 시끄럽던 머리 속이 비로서 무음이 된다. 얇게 올려진 물감은 두 시간 정도 지나야 물기가 마른다. 다시 같은 동작을 통해 물감이 또 한번 올려진다. 이전 붓질보다 색이 약간 드러난다. 이렇게 칠해진 물감이 마르면 깨끗이 빨아놓은 붓에 다시 물을 축이고 물감 통에 붓결을 고르며 똑같은 절차가 진행된다. 이 단순한 반복적인 행위가 수차례 많게는 십여 회 더해지면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기도 한다. 그렇게 비로서 하나의 곡면이 완성된다. 실을 토해서 자신의 집(누에고치)을 짓는 누에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색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도 하지만 붓질과 붓질 사이에 생기는 물리적 시간은 다른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틈새의 시간을 제공한다. 잠시 책을 볼 수도 있고 정원에 나가 작년에 심은 장미의 줄기를 살필 수 있다.
양평으로 이사를 와서 누리는 호사다. 봄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걷어내니 지난해 심어놓은 채송화의 통통한 줄기가 초록빛 얼굴을 내민다.
가을철 성가시던 은행나무잎들은 작은 화초들의 겨울 담요가 된다. 서로 의지하며 생명을 틔우는 모습이다. 화폭의 색면들은 그런 생명정원의 어우러진 모습이다.
작업실로 돌아와 완성된 하얀색 반곡면 위에 칠할 색을 준비한다. 밝은 노란색을 칠해볼까. 아니면 여린 새순을 닮은 연두색을 올려볼까. 노란색은 어린 시절 머리카락을 사르륵 넘겨주는 엄마의 무릎베개를 하고 잠깐 잠들었을 때 느꼈던 망막에 어리던 심리적으로 가장 평온하고 낙천적인 색이다.
연두색은 긴 겨울이 봉인 해제된 듯 밀려오는 따스한 공기와 같이 위로와 편안함을 준다. 색을 올리고 물감이 마르기를 반복하면서 색이 익어가기를 기다린다. 잠자리 날개와 같이 얇은 시간이 층층이 쌓인다.
어느덧 나의 정원은 찬란했던 벚꽃도 지고 새로운 색채들로 충만해질 시간이 왔다. 내가 정원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점차 선명해지고 다양해지는 색채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계절과 날씨와는 무관하게 내 작업실에서 펼쳐내는 화사한 붓질들이 보는 이의 마음의 정원에서도 다채로운 색채의 생명들로 가득하여 그 안에서 위로 받고 쉼을 얻기를 희망한다. ’색 띠‘ 작가 하태임의 작업풍경이다.
근래들어 대중적 인기가 치솟고 있는 ’색 띠‘ 작가 하태임의 개인전이 오는 24일부터 7월 18일까지 가나부산에서 열린다. 다채로운 컬러밴드는 작가의 시그니처 이미지가 되었다.
작가는 캔버스에 배경색을 칠하고 그 위에 여러 색의 반투명한 색띠들을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여러 층의 레이어를 만들어 낸다. 몸통을 컴퍼스의 축처럼 고정하고 팔을 뻗어 선을 그리면 자연스럽게 곡선이 나오게 된다. 작가만의 색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색 띠 작업은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문자를 지우는 제스쳐에서 비롯됐어요. 처음엔 노란색, 하얀색으로 그림 속의 글자를 지우는 걸 표현했지요. 그 후부터 제 작품에서 문자들이 점점 사라져요. 내용이나 형상이 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 과정을 통해 남은 색깔과 빛, 이런 것들이 제게 위안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컬러로 소통하기로 결심했죠“
작가는 힘든시기에 색채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손질하는 행위와 같았다. 이제 화폭속 색들은 정원의 꽃처럼 자신들의 ‘색 말’을 선사한다.
작가는 최근들어 캔버스를 벽에 세워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을 살리거나, 컬러밴드를 한쪽에 치우치게 하여 여백을 살리는 유형, 기존의 붉은 형광색이 빠진 회색바탕에 청색이나 녹색조 컬러밴드로 구성한 유형등으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 큰 틀에서 색이 순해지고 정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색채 화가들은 화폭의 색공간을 두 가지 방향에서 사용해왔다. 구성주의적 경향과 표현주의적 경향이다. 전자가 음악적 율동과 기하학적 패턴을 통합함으로써 형상을 실험했다면, 후자는 몰형상과 자동기술에 의한 내면 심상풍경을 창출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하태임 작가는 이 둘을 통합하고 있다.
”마주보기, 등 돌림, 같은 곳을 바라보기, 교차하기, 어긋남을 이룬 색띠들의 ‘반복과 차이’는 나만의 몸이 기억하는 ‘색경험’이자 음의 높낮이로 조화를 이룬 멜로디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캔버스에 배경색을 칠하고 그 위에 여러 색의 반투명한 색띠들을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여러 층의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빨강의 경우는 5,6회, 흰색의 경우는 11회 정도 덧올려야 하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두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색은 심리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천명해주는 하나의 심상언어같은 존재죠. 노랑은 빛으로 찬란한 기억 또는 치유의 에너지이거나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인식됩니다.연두는 초여름의 싱싱함,휴식과 정신적 평화를 상징하고요. 하양은 역사적으로는 천상의 순결함을 의미하지만 슬픔과 고독한 색으로 읽을 때도 있어요.”
작가는 인생의 거친 풍랑을 지나고 내면을 마주하고서 만난 자신을 색으로써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색채도 전자기기 시대에 맞춰 스크린에서 나오는 형광성을 띠도 있어 당대성의 색감이라 할 수 있다.
“핑크는 화해와 너그러움의 색입니다. 깊고 쓸쓸한 겨울을 살아내게 한 핑크는 따스하고요.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버리고 다시금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색이지요.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춘기에 이르면 유년기에 사랑해 마지않던 핑크를 유치하고 여성성을 드러내는 색이라고 외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생의 거친 풍랑을 지나고 내면을 마주하고서야 만난 자신의 비뚤어진 고집스러움에 용서를 구하는 색입니다.”
작가에게서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느껴진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다. 위로와 공감의 세계다.
하태임 작가는 부산에서 7년 만에 갖는 이번 개인전에서 회화 40여 점 뿐 아니라 새롭게 시도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도 선보인다. 새로운 건축적 설치조각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