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현정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수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참여교수 1천 명 중 340명(34%)이 2017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꼽았다고 합니다. 파사현정은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 것을 타파하고 옳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파사현정이라는 말을 원불교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사견(邪見)과 사도(邪道)를 깨뜨려 정법(正法)을 구현하는 것, 인간세상의 온갖 부정부패 부조리를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런 뜻을 가진 파사현정을 왜 교수님들이 올 해의 사자성어로 선정을 했을까요?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뜻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교수님들은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내야 국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바로 파사현정은 ‘적폐청산’을 화두로 달려온 한국사회를 이 한 마디로 압축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원래 파사현정이라는 말은 인도 용수(龍樹 : 150~250)의 중관(中觀)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관은 말 그대로 바르게, 아무런 걸림 없이 공정하게 본다는 뜻이지요. 저마다 주장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틀렸다는 것이 바로 중관사상의 출발점입니다. 파사의 깨부숴야 할 사(邪)는 사악한 것이 아니라 저만 옳고 저만 잘났다는 극단의 생각이나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용수의 중관사상은 정확하게 중도(中道)의 사상이며, 파사현정은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드러내야 할 어떤 바른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극단이란 잘못을 깨는 것, 그 자체가 정(正)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양 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포용을 실현하는 것이 ‘파사현정’인 것입니다.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변화의 시대에 돌입한 지금 강퍅한 대립과 대결, 증오와 배제로는 어떤 긍정적 변화도 이루기 어렵습니다. 파사현정은 사도(邪道)를 파척(破斥)하고 정리(正理)를 나타냅니다. 사악함이 득세하고 정도가 무너지는 것은 바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의롭지 못한 불의가 싹트는 소지를 없앰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함이 인류 모두의 공통된 염원인바 그것이 곧 ‘파사현정의 실천’이 아닐까요?
오랜 인류의 역사에 있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악함이 풍미하면 그 사회는 타락하고 급기야는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반대로 정도가 바로 서면 그 사회는 건전하고 국가는 융성하는 길로 나가게 됩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사특(邪慝)하면 그 자신과 가족 및 가까운 몇 사람에게 피해가 갑니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사악하면 그가 소속한 조직과 사회 및 국가에게까지 그 피해가 미치게 됨으로 참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도와 사악함, 곧 바름과 바르지 못함이 대립할 때에는 정도가 승리하는 것이 인간의 정상적 소망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간 사회의 비극이 있고 이해 못할 불합리가 있는 것이지요.
가장 저질스럽고 혐오할 일은 정도를 빙자하고 정의를 표방하면서 뒤로는 사악함을 자행하는 처신입니다. 가면을 쓴 사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 표리부동한 사람, 이중인격자,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고민하고 또 추구해야 할 정신이 있습니다. 그 단어는 다름 아닌 ‘진리’와 ‘정의’가 아닐까요? ‘진리’는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진리를 포기하면 우리는 진정한 민주시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참’을 이야기하지만,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참됨’을 얻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참’이 ‘거짓’ 또는 ‘허위’와 대립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성실하거나 협잡을 하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비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파사현정에는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강한 실천의 의지가 있습니다. 파사현정은 원래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불교에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유학(儒學)에서도 ‘척사위정(斥邪衛正)’이나 ‘벽사위정(闢邪衛正)’을 말하고 있습니다. 척사위정은 역시 사악(邪惡)한 것을 배척(排斥)하고 정의(正義)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지금 한창 어지러웠던 국정운영이 수습되고 있는 가운데 교수들은 문재인 정부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한 집단은 반드시 몰락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정치가 부패한 경우 특정집단의 단순 정치적 몰락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를 두고 구 집권세력의 일부 정치인들은 정치보복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지금껏 이루어진 수사진행 상황과 처벌과정 어디에도 협박과 회유에 의한 거짓진술이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부자 진술과 명백한 객관적 증거만 있을 뿐이지요.
정치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가치구현에 부합하지 않고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하거나 특정 정치집단의 기득권 유지에만 함몰돼 있다면 그 행위의 결말은 불 보듯 번한 것입니다. 서슬 퍼렇던 절대 권력도 국민의 저항 앞에서 결국 탄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역자들 또한 법의 심판대에 세워지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은 어쩌면 이미 예정된 당연한 수순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쌓이고 쌓인 부정부패는 반드시 척결되어야 합니다. 불파불립(不破不立)! 깨뜨리지 않으면 바로 정의를 바로세울 수가 없습니다. 극하면 변하는 것이 천지의 이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모두 그 왕성한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부디 파사현정!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맘 편하게 사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2월 2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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