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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정치 입문해선 '야당 저격수'로..
정치

홍준표, 정치 입문해선 '야당 저격수'로

김현태 기자 입력 2015/05/09 22:16
6공 황태자 박철언 구속으로 명성, 정치 입문해선 '야당 저격수'로
“검사를 관두고 나니 그 동안 수사했던 조폭들이 수도 없이 협박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울= 연합통신넷, 김현태기자]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검찰조사를 받은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1억에 양심 팔만큼 타락하지 않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날 홍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20년 정치를 했지만 1억에 양심을 팔만큼 타락하지 않았다”며 “내 명예는 끝까지 지킨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성완종에 대한 무리한 수사로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검찰이 또다시 그 잔해 수사를 무리하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검찰이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수사를 할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됐던 홍준표 경남지사는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자신의 정치 입문 계기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홍 지사의 정치 행보에 못내 걱정이 많았던 그의 부인이 “점을 봤더니 당신이 2인자는 한다더라”며 안심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대통령 다음 2인자인 당 대표가 됐으니 용한 점쟁이”라며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즈음(2011년 6월) 대표 경선을 앞두고 성완종(64ㆍ사망)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1억원을 받은 의혹은 그의 정치 생명을 끝낼 수도 있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검찰 소환 전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나를 수렁에서 건져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심정을 밝히며, 자신의 친정이었던 검찰과의 일전을 예고했다.

김진태 검찰총장과 사법연수원 동기(14기)인 홍 지사는 1993년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재직 시절 슬롯머신 업계로부터 뇌물을 받았던 ‘6공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을 구속하면서 명성을 높였다. 당시 슬롯머신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모래시계가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모래시계 검사’별명까지 얻었다. 이후 검찰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는 1995년 사직하고, 신한국당에 입당해 4선 의원을 지냈다.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가, 2001년 재보궐 선거로 복귀한 후 특히 ‘야당 저격수’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저격은 진실과 거리가 멀 때도 많아 비판의 대상이 됐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BBK 사건 당시 홍 지사는 ‘김경준 기획입국설’을 주장하며 야권의 공세를 무마시켰지만, 기획 입국설은 이후 조작으로 드러났다.

 

현재 홍 지사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 특별수사팀 팀장인 문무일 대전지검장과의 인연도 저격수로 활동하던 과정에서 맺었다. 2004년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비리 수사를 맡은 특검팀에 파견됐던 문 팀장은 제보자를 자처하며 찾아온 홍 지사를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홍 지사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 및 뇌물이 1,300억원 규모의 양도성예금증서(CD) 형태로 은닉됐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무근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현재 홍 지사의 변호를 맡고 있는 이들은 당시 문 팀장과 함께 특검팀에서 일했던 이혁 변호사(당시 검사)와 이우승 변호사(당시 특검보)다.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동원했던 ‘변칙적 저격’이 홍 지사 자신의 정치 생명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얄궂은 인연의 고리로 돌아온 셈이다.

경남도지사로 선출된 뒤에도 그의 행보는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홍 지사는 2013년 5월 “적자 누적과 기득권만 유지하는 노조원들의 모습에서 진주의료원 회생 가능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저소득층이 주로 이용하는 진주의료원을 폐업했고, 올해에도 경남도 내 초ㆍ중ㆍ고 무상급식 사업에 대해 예산지원을 중단해 큰 반발을 불렀다.

무상급식 지원중단에 대해 “가난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비난이 폭주했으나 자수성가형 인물이 흔히 가지는 철학의 연장선상으로 읽히기도 했다. 홍 지사는 유년시절 가족이 야반도주를 하고, 어머니가 고리채 업자에게 머리채를 잡히며 동네를 끌려 다닌 아픈 경험이 있다. 아버지가 장물인 비료를 매수했다는 누명을 쓴 일화를 계기로 육군사관학교 진학 대신 검사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누구의 조력도 받지 못한 채 1972년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다. 당시 일주일 내내 과외를 해서 학비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고 그는 자주 회상했다.

검사가 된 홍 지사는 “조직 폭력배들을 검사실에 수십 명씩 불러다 놨더니 설렁탕 사 먹일 돈이 없었다. 검사실에 버너를 놓고 라면을 끓여 나눠먹으면서 조사를 했다”며 1993년 슬롯머신 수사 당시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조폭 수사를 하던 검사로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때부터 술과 여자를 멀리했다는 것도 자주 했던 말이다.

가족의 불행과 가난, 정치권에서의 질곡 등을 극복해온 ‘강골검사’출신의 홍 지사이지만 이번 ‘성완종 리스트’사건이 몰고 온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홍 지사에게 불우했던 성장환경은 ‘모래시계 검사’로 거듭나는 청렴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가난으로 입었던 ‘상흔’은 부유층의 높은 지지를 받는 보수정당의 정치인으로 입지를 다지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눈총을 사기도 했다. 2006년 당내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던 홍 지사는 경쟁자인 오세훈 후보를 ‘강남 부유층 이미지’로 규정,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오 후보에게 패배했던 홍 지사는 “(오 후보가) 강남 헬스클럽에서 썬텐하면서 이미지 가꿀 때 나는 밤새워 서울시정을 연구했고, 피눈물 흘리며 대여 투쟁을 해왔다”며 분해하기도 했다.

2011년 당대표 수락연설에서부터 공식ㆍ비공식 석상을 가리지 않고 밝혔던 ‘일당 800원짜리 울산 현대조선 경비원으로 일하며 영하의 날씨에 모닥불 앞에서 떨고 있던 아버지의 등판을 보고 피눈물을 흘렸다’는 일화에도 당내 일각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당시 홍 지사 견제 세력의 한 축이자 현대중공업 회장을 지냈던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놓고 표출한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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