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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후 3년… 해고가 낳은 절망의 끝..
사회

해고 후 3년… 해고가 낳은 절망의 끝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5/05/11 15:48

해고가 낳은 절망의 끝 - 기아차 해고노동자 고 윤주형


사진 속의 그는 늘 웃고 있었다. 영정사진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그와 친했던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장대전씨는 그를 “선배, 선배하며 따르면서도 어렵고 힘든 이야기 잘 안 했다. 항상 밝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기아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윤주형씨다.

 

2007년 기아차 사내하청 업체에 입사한 윤씨는 자동차 도색이 잘되라고 약품을 뿌리는 ‘박리공정’에서 일했다. 그는 1년 뒤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조합이 통합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대의원이 됐다.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그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조합원 아저씨들, 형님, 아우, 여성 조합원들이 회사 관리자 앞에서 어깨 당당하게 피고 일할 수 있도록 신나는 현장 만들겠습니다.”


윤씨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09년 ‘강제 전환배치 전환 거부’를 주장했다가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실랑이로 2010년 4월 징계해고됐다. 문자로 온 해고통보를 보고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고되고 난 다음에 해고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실 어디 가나 언제나 해고가 예고가 되어 있고. 자신의 당당한 요구를 하게 되면 회사에서 잘리죠.” 윤주형씨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해고는 생활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생계가 막막해진 윤씨는 이삿짐 센터, 공사 현장 등에서 일했다. 윤주형씨는 과거 “형사고발, 민사고발 각종 고발을 받아서 벌금이 나왔는데 벌금을 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벌금 250만원을 못 내 수배되기도 했다.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김수억씨가 업무방해 등으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고 2011년 9월 출소했을 때도 해고자들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자부심은 버리지 않았다. “투쟁하는 동지로 서고 싶은데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 보는 걸 견딜 수 없었어요.”

 

2010년 2월 해고된 김수억씨가 출소한 2011년 말 윤씨를 포함해 경기도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2006년 해고된 기아차 2·3차 하청노동자 이동우씨, 2008년 해고된 기아차 정규직 노동자 이상욱씨 등 4명은 ‘기아차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를 꾸렸다. 모두 노조 활동을 하다 징계해고된 이들이었다. 이들의 복직 투쟁은 공장 안팎을 넘나들었다.


 


공장 안에서는 농성 천막을 짓고 공장 밖에서는 다른 회사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희망뚜벅이, 희망광장에 이어 정리해고 사업장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에도 참여했다. 윤주형씨는 연대활동을 즐거워했다. 이동우씨는 “저나 윤주형씨나 기륭전자·재능교육·세종호텔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많이 공감하고 깨우쳤어요. 윤씨도 또래를 만나서 그런지 생기발랄했고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장 밖과 안의 상황은 달랐다. 윤주형씨는 공장 밖에서 힘을 얻었지만, 공장 안에서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윤씨의 해고를 노조활동으로 인한 부당해고로 인정하지 않아 생계비 지원을 거절했고, 이동우씨의 조합원 자격도 인정하지 않았다. 장대전씨는 “노동운동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걸 많이 억울해 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같은데도 ‘이동우 동지는 조합원이다’라고 쓰기도 했고요”라고 말했다.


윤씨도 생전에 이 부분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었다. “노동자 윤주형이 해고되고 나서 가장 참담하고 힘들었던 건 해고노동자는 도와주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 해고노동자는 많이 모자라고 과격한 존재라는 시선이었어요. (노조) 지침을 사수했지만 정규직 노동조합은 그 투쟁을 하라고 허락한 적이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가 불편해하던 ‘과격한 존재’라는 시선과 달리 윤씨는 ‘보통사람’이었다. 2012년 7월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윤씨는 최근 가장 기쁜 일 중 하나로 노천탕에 갔던 일을 꼽았다.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수련회를 갔는데 노천탕이 너무 좋은 거에요. 태어나서 그런데 처음 가봤거든요. 최근 가장 기뻤던 때 중의 하나고요. 정말 기뻤어요. 하늘 보면서 목욕할 수 있다니.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다니.”


2012년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추석에는 ‘가족’도 얻었다. 장대전씨는 함께 자신의 고향집을 찾은 그를 어머니에게 “배 안 아파 낳은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고향 어디 갈 거야’하니까 ‘집이 없어요, 저 고아에요’하는 거에요. 그렇게 밝은 얼굴이 고아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추석 때 우리 집에 같이 가서 송편 먹으면서 어머니한테는 ‘배 안 아파 낳은 아들’이라고, 아들한테는 ‘니 삼촌’이라고 소개했죠.” 장씨가 말했다. 그해 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윤씨에게 장씨는 “집사람하고 같이 만나자”는 말도 건넸다.

 

그러나 밝은 얼굴과 달리 윤주형씨의 마음은 상처투성이였다. 2012년 9월 기아차 노사는 해고자 복직안을 발표했다. 정규직 이상욱씨는 2013년, 사내하청 해고자 김수억씨는 2014년 복직하지만 이동우·윤주형씨는 기아차 계열사 취업 알선 구두 합의에 그쳤다. 그 발표 뒤 윤주형씨는 ‘잠수’를 탔다. 이동우씨는 “합의안 나온 뒤 매일 나오던 천막농성장에도 나오지 않고 회의도 안 나왔어요.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셔야 잠이 오는데 깨보면 낮이고, 해고자들에게 미안해서 그랬다’고 하더라. 그렇게 한 달간 연락이 안 됐죠”라고 회상했다. 그해 말, 장대전씨와 만난 윤주형씨는 “힘들다”고 토로했다. “2012년 말에 다방에서 만났는데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여러 가지 한탄을 했어요. 내가 ‘이동우씨는 7년 넘게 하고 있는데 얼마나 됐다고 힘들어 하냐’고 했더니 한숨만 푹 쉬더라고요. 술 생각나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장씨는 그 만남이 잊히지 않는다.

 

2013년 1월28일, 윤주형씨가 오랜만에 공장 안 천막농성장을 찾았다. 이동우씨는 “오랜만에 회의에 와서 수요일에 집회하자 뭐 하자 일정도 공유하고. 회의 끝나고 커피 마시면서 지난주에 뭐 했는지 물었더니 법원에 다녀왔대요. 입양됐다 파양돼서 호적이 없다고, 호적이 없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밤 윤씨는 세상에 남길 마지막 글을 썼다. “아마도 저는 평생 엄마를 찾아 헤맸나 봅니다.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더라고요.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가 없어 너무 힘이 들었지요. 버티는 일조차 힘이 들더라.” 윤씨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2013년 1월28일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의 10㎡ 월세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아였고 파양 당한 아픔까지 있는 그에게 기아차 화성공장은 돈을 벌 수 있을 뿐 아니라 친구와 동료를 만날 수 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윤씨는 생전 “제가 꼭 복직하고 싶은 이유는 딱히 갈 때가 없어서 갈 데가 여기밖에 없더라고요”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는 공장에 돌아가지 못했다. 가족 없는 그를 대신해 상복을 입은 해고자 3명은 “해고자로 땅에 묻을 수 없다”며 장례를 미루고 ‘원직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2013년 1월28일자 ‘재입사’안을 제시하며 장례를 치르자고 말했다. 노노 갈등 속에 해고자 동료들이 11일을 버텨 그는 해고됐던 회사로 복직할 수 있었다.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경기도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노제가 열리던 날, 그의 관 옆에는 ‘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고 적힌 검은 천막이 함께했다.

 

그가 떠난 해 이상욱씨가, 2014년에는 김수억씨가 복직했다. 하지만 이동우씨는 올해로 9년째 복직 투쟁 중이다. “윤주형씨 죽고 나서 1년 동안 꿈에 안 좋은 모습으로 계속 나타났어요. 거울에 자꾸 보여서 씻을 때도 화장실 문을 못 닫았어요. 이제는 한 번이라도 꿈에서 전처럼 웃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이동우씨가 복직해야 그렇게 해 줄 것 같아요.” 김수억씨가 말했다. ‘마지막 해고자’ 이동우씨는 퇴근시간이 되면 기아차 화성공장 안 통근 버스 정류장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엔 서울중앙지법이 기아차의 모든 사내하청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가 형님처럼 따랐던 사내하청 노동자 장대전씨도 “기아차의 정규직 노동자”로 인정받았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전태일과 함께 누워 있는 그는, ‘해고자 전원 복직’과 ‘사내하청 비정규직 정규직화’라는 자신의 오랜 꿈이 실현될 길이 설핏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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