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유명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작가군이 주목을 받고 있다. 갤러리바톤에서 13일부터 9월 16일까지 개인전을 갖는 유이치 히라코(Yuichi Hirako, b. 1982)는 하이브리드 형상을 가진 존재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 환경과 공존 등 가볍지 않은 이슈들을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화풍으로 묘사해오며 국제적인 인지도를 키워온 작가다.
사물의 조합으로 인간의 형상을 구현하는 작풍은 베르툼누스(Vertumnus, 1590)로 잘 알려진 16세기 궁정화가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가 있다. 아르침볼도는 대부분의 궁정 화가가 왕족과 특권 계급의 초상화에 매진하던 관행과는 다르게, 과일, 꽃, 나무 등 자연물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표현한 ’조합된 두상(Composite Heads)‘연작을 다수 남겼다. 이러한 작업들은 고전주의 화풍이 지배하던 시대에 시각적인 놀람과 유희를 선사했다. 계절의 순환, 4원소 등의 주제를 모태로 한 작품들은 '새의 얼굴을 가진 인간'을 자주 등장시켰던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등 20세기 초 발흥한 초현실주의의 전신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전시 제목인 '마리아나 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 아니라 태평양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Mariana Trench)의 지명에서 착안하였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아틀란티스(Atlantis) 설화같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구 저편의 어딘가에 인간과 외형이 유사한 캐릭터가 숲속에서 유유자적하며 다른 생명체와 공생하며 일상을 보낸다는 설정은 히라코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중심 플롯이다.
‘마리아나 산'은 일본에서 신성한 장소로 간주되는 '숲 지대'이기도 하다. 순환계의 핵심이자 동식물이 의식주를 위탁하고 있는 곳이다. 산지가 발달한 오카야마현 출신인 작가는 런던 유학시절 사람들의 정신적 위안을 위한 도시의 녹지대, 가로수 그리고 가정 내의 인테리어용 식물들의 처지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공간에서 통제를 받으며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지속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상황은 애초에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는 생각은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중심 주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는 모든 자연을 통일된 하나의 전체화된 개념에서 조망하는 심층 생태학(Deep ecology) 관점과도 연결되어 있다. 유이치의 작품에서 자연은 극복하거나 개척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동등하게 대하고 존중해야 하는 위치로 묘사된다. 파괴된 자연과 고통받는 동식물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 현대 환경 보호 운동의 특성이라면, 히라코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작품 자체의 미학적 가치 너머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매개체로써 회화의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해오고 있다.
히라코는 트리 맨(Tree Man)이라고 불리는 하이브리드 캐릭터외에도 고양이, 강아지 등을 비중 있게 등장시킨다. 이러한 보조 캐릭터의 등장은 현대 애니메이션의 구성 기법에 있어 하나의 정석으로 여겨진다. 장편 시리즈에서 자칫 발생하기 쉬운 스토리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장면의 정황 전달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메인 캐릭터와 같은 선상에서 항상 보호를 받는 설정은, 자연과 동물이라는 대상에 대해 작가가 품고 있는 연민을 상징하기도 한다.
윔블던 예술대학교(Wimbledon College of Art, London)를 졸업한 유이치 히라코는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Tokyo Opera City Art Gallery, Tokyo)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도쿄도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우에노모리 미술관(Ueno Royal Museum, Tokyo), 도쿄도 미술관(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Tokyo), 군마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Gunma)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상하이 파워롱미술관(Shanghai Powerlong Museum, China), 리서 아트 뮤지엄(Lisser Art Museum, Netherlands), 아크조노벨 아트 파운데이션(AkzoNovel Art Foundation, Netherlands)등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