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교수(세명대 저널리즘 스쿨)는 ‘언론의 자유’ 신봉자다. 어떤 학자 보다 학문이 깊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다. 그래서 그의 언론학은 책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현장의 언론을 통찰한다.
정말 언론을 사랑하는 언론인이라면 그를 친구요 동지로 받아들여서 그의 말에 귀 기울여야 마땅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이 교수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지금의 언론 상황과 언론인들의 자세가 몹시 잘못 된 건가, 고민할 때가 있다.
그가 언론계의 현안이 돼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 중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짜뉴스 피해배상제도)에 대한 찬성 입장을 적극적으로 밝히자 언론계 일각에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그 한 예다.
그냥 가짜뉴스나 써대는 사이비기자들이 아니라 현업 언론단체장, 혹은 영향력 있는 몇몇 언론관계자들도 그 비난대열에 가세한 모양이다. 그중에서 이 교수(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연세 칠십 가까운 노학자다)는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의 페이스북 글 중 “당신이 유력학자로 힘 센 언론사 무슨 위원이니, 위원장이니 하며 권위를 누리는 동안 우리는 해고당하고 징계당하고, 인사불이익 당하며 사주한테 그리고 온갖 권력에 맞서 싸웠다. 머리 터지게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 세월에 당신은 어디서 뭐하고 계셨길래 모든 정의를 독점한 듯 이리 당당하신가?”라는 대목이 유독 가슴 아픈 듯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당신이...) 힘 센 언론사 무슨 위원이니, 위원장이니 하며 권위를 누리는 동안(...)”이라는 부분만은 내가 직접 분명히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 ‘권위있는 자리’에 모신 장본인 중 하나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공영언론 연합뉴스를 관리 감독하는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모색했던 부분은 연합 보도들에 대한 다양한 외부의 비평(혹은 비난)을 어떻게 건설적.효율적으로 내부가 수용할 수 있게 하느냐의 방법이었다. 그것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이미 법적으로 마련돼 있었는데 바로 ‘수용자권익위원회’였다. (공영방송에 만들어진 시청자위원회와 같은 것이다. 공영언론은 아니지만 한겨레신문도 비슷한 제도를 두어 공정보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런데 수용자권익위원회의 구성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9명의 외부 위원을 사장이 자기 마음대로 뽑을 수 있는 구도였다. ‘각계 인사’라는 단서가 있었지만 어떻게 9명의 위원들이 우리 사회의 모든 ‘각계’를 공평하게 대변할 수 있으며, 그래도 각계 대표인만큼 각각 분야에서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언론 현장에 대해서는 잘 모를 가능성이 크고, 사장이 뽑은 사람이 어떻게 사장이 이끄는 조직의 생산물에 대해 늘, 가차없이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당연한 문제의식이었다.
다행히 사장이 나의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해 3~4명의 외부 언론전문가 추천 권한을 진흥회에 주어 그때 모신 분 중 한 분이 바로 이봉수 교수였다.
그러나 이 교수가 처음부터 자리를 선뜻 수락한 건 아니었다. 그전에 몇몇 언론사에서 겪었던 현업 기자, PD들과의 갈등에 따른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언론 외부인이 보도를 비판했다가 기자와 척을 지면 그 보복에 따른 고통이 얼마나 깊고 오래 가는지 한두 번 겪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교수는 연합뉴스 보도를 조금이라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완곡히 거절했는데 내가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자 거의 마지못해 자리를 수락했다. 위원장이 된 것은 단순히 위원 중 최연장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원회라는 것이 보통은 한 달 한 번씩 모여 덕담이나 하다가 식사하고 헤어지기 일쑤인데 이 교수가 위원장을 맡은 이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보고를 받곤 했다).
논의 이슈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실제 토론 과정에서까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고 논쟁이 있었다. 심지어 뒷풀이 식사자리에서까지 사장 등 간부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권위를 누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마저도 고작 1년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물론 짐작은 가지만) 사장이 ‘법적’으로 자신의 권한으로 돼 있는 위원 선정권을 회수하겠다는데 어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이 교수와 만나 아쉬움을 나누면서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윤 위원장이 이런 사정까지는 잘 몰랐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해고당하고 징계당하고, 인사 불이익 당하며 사주한테 그리고 온갖 권력에 맞서 싸웠다. 머리 터지게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 세월에 당신은 어디서 뭐하고 계셨길래 모든 정의를 독점한 듯 이리 당당하신가?”라는 대목은 몇 번을 읽어도 납득할 수가 없다. ‘머리 터지게’ 싸우는 것은 언론자유를 사랑하는 현업자들의 몫이지, 언론학자들의 몫이 아니지 않는가. ‘해고당하고 징계당하고, 인사 불이익 당한’ 것은 SBS 노동자들의 투쟁사의 일부다. (그럼에도, SBS는 여전히 저 모양이다).
언론학자는 해고당하고 징계당하고 싶어도 당할 수가 없는 처지 아닌가. 연구하고 충고하고 비판하고 가르치는 것이 본령인 언론학자에게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난감하지 않겠는가.
물론 많은 언론 현업자들과 언론 교수, 심지어 나 같은 늙은 언론노동자에게도 공통점은 있을 것이고 함께 싸워야 할 지점이 있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신봉하며 언론을 사랑한다는 그 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교수나 나는 가짜뉴스 방지를 위한 온갖 노력에 눈 감고 귀 닫은 채 저항만 하는 언론인들이 진정 언론을 사랑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족: 이 교수를 통해 읽게 된 윤 위원장의 페북 글에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특히 주위의 기대와 신망을 받는 막중한 위치에 있는 인사가 칠십 가까운 노학자를 ‘당신’이라는 부르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직전 장관을 ‘추미애씨’라고 호칭하는 한동훈이란 ‘놈’의 인격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