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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자촌

강대옥 기자 입력 2018/01/04 16:00 수정 2018.01.06 18:00

순천에서 목포 방향으로 2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행정구역상 순천시 별량면 신석리가 나온다. 신석에서 척동이라 마을 사이에 전통적인 고자촌이 있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찾아보기 어렵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들 사이에서 고자촌의 이야기가 화재가 되곤 했다. 고자촌이 전국적으로 회자된 것은 아파트를 분양받는 우선 조건 때문에 한두 자녀만으로 정관수술을 받았던 신반포 단지를 사람들을 고자촌이라고 불렀다는 수필가 김인호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특정지역에 생식 기관이 불완전한 남자인 고자들이 집단으로 부락을 만들어 살아가는 고자촌이 존재했다. 고자촌은 개 고자와는 거리가 먼 참고자와 거세고자에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거세 고자촌이 형성되었던 곳이 남양주였다. 이곳은 궁중에서 은퇴한 환관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고자촌이 형성되었다. 이에 반하여 참고자촌은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건축구조, 부의 축적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독특하다.

참고자촌은 이웃지역의 마을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부농을 형성했고 인심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인은 참고자촌의 부 축적 시스템에 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자녀들을 많이 두었다. 보통 아버지가 장남에게 유산을 우선적으로 분배했고 나머지 자녀들은 입에 풀칠하기 급급했다. 이에 반하여 고차촌의 가족구성을 보면 한명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다. 이때 양자의 첫 번째 조건이 참고자 였다. 개고자나 거세고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양자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은 이들의 자부심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은 모두 다른 성씨이지만 양자로 들어오면서 입양된 집안의 성씨를 갖게 된다. 일반가정에서는 가문을 잇기위해서 혈연에 의한 입양이었지만. 다시 말해서 한 자녀에게만 재산을 상속하기 때문에 지역의 농민들에 비해서 많은 양질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성적으로 불안정한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주변에 못사는 집 처녀가 시집오는 조건으로 논 두세 마지기를 사돈집에 주었지만.

고차촌의 건축물의 특징은 우선 솟을대문에 있다. 양반집에 뒤지지 않는 위엄과 부의 상징을 나타내려 노력했다 보여진다. 담장은 일반 양반집보다도 낮았는데 그 원인을 추정할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기에 여기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보통 흉년, 기근이 들 때면 지역주민들에게 인심을 넉넉히 베푼 것은 심리적인 영향이 크다고 보여 진다. 지금은 고자촌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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