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초원의 목동이 양떼를 몰고 풀을 찾아 나서듯이, 의미있는 삶을 찾아 유목민처럼 살아왔다. 법조인을 꿈꾸며 대학에 들어갔지만, 시대정신에 부름받아 독재와 맞서는 ‘운동권’이 됐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끝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그때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가 손에 쥐어졌다. 8.15 해방공간에서 나라의 틀이 만들어지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에 ‘문화강국론’을 펼치다니?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문화상품’ 기획자로, 애니메이션영화 기획자로, 드라마 ‘주몽’과 ‘선덕여왕’의 제작자로 이름을 알린 문화기획자 김태원씨의 이야기다. 그가 이번엔 안양미술관-김중업건축박물관 관장을 맡았다.
김 관장에게 1947년 백범이 원하던 나라는 지구적인 통찰로 다가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은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백범일지)
“편안한 삶을 살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문화강국론이 처음엔 신기하기도 하고 저를 부끄럽게 했어요. 원주교도소를 나오면서 백범이 이루지 못했던 문화강국의 꿈을 내가 하나라도 현실에 옮겨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내 인생이 보람되고 후회 않을 것 같아서요.”
그는 문화예술 타이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첫 직장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문화디자인과 플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문화강국론을 설파하는 문화전도사가 됐다.
“어떤 분이 식사자리에서 제 문화강국론 얘기를 듣고 얼마 후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갤러리를 하나 만들테니 운영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강남 가로수길에서 갤러리를 5년간 운영을 하게 된다. 예술의 대중화와 산업화의 초석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트컨설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이저 갤러리에서도 브로슈어에 아트컨설팅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양지파인리조트, 대우중공업 서울역본사 등에서 문화복지차원의 공간컨설팅 의뢰가 들어왔어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아트포스터나 젊은 조각가의 작품을 구매해 공간을 꾸며주었지요.”
그는 기업 공간미학 컨설팅에 머물지 않고 지역관광지나 미술관 등의 기념품숍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에서도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우리문화상품’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서울대 홍대 금속공예과 출신 작가들을 모아 기념품을 제작했다. 사비를 털고 성수동 공장 등을 일일이 직접 발품팔아 이룬 성과다. 우리만의 전통문양 등으로 정체성을 살린 까치호랑이 열쇠고리, 북마크, 명함지갑 등을 만들었다.
“기업기념품, 항공사 기내기념품으로도 수요가 생겼어요. 호암갤러리에서 우리전통문양 전시가 이뤄지고, 문화관광부에선 ‘우리문화상품’공모전을 여는 촉매제가 됐습니다.”
그는 공공미술 쪽으로도 호출을 당했다. 1995년 당시 남해군수로 있던 김두관 의원이 그를 불렀다.
“다짜고짜 남해군에 어울리는 컨셉이 뭐 없겠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조각가가 버스정류장을 만들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으시냐’고 했지요”
예술가들이 만든 버스정류장은 전국에 화제가 됐고 전국 지자체들이 벤치마킹을 했다.
그는 SBS 목동 신사옥 건립때도 공간컨설팅을 했다. 1996년 당시 태영의 기획실장으로 있던 윤석민 회장과 소통을 했다. 직원들에게 1층과 지하, 야외공간을 어떻게 사용했으면 좋겠냐고 조언을 구했는데, 연금매장이나 이발소 등의 얘기만 나와 뭔가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겠냐며 컨설팅을 의뢰해왔다.
“지하 2층부터 지상 2층까지 중앙공간을 뚫어 열려진 공간을 제안했습니다. 방송국은 국가보안시설이라 일반의 접근이 어려우니, 그렇게 해서라도 방송박물관 컨셉으로 가자고 했지요. 오르내리는 방식에 있어서 벤치마킹 대상을 일본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조코쿠노모리미술관)에 있는 프랑스 스테인드글라스 예술가의 작품 ‘행복을 부르는 심포니조각’탑으로 정했지요. 높이 18m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태양광에 의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입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안타깝게도 IMF사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SBS로부터 사내 벤처 ‘컨텐츠 허브’를 만들고 일해줄 것을 제안받는다. 갤러리에서 손을 떼고 SBS 팀장으로 2년여 일하던 시점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하루는 업체 관계자가 업무차 왔는데 소위 수석팀장인 제게는 인사도 없이 그냥 가버리더라고요. ‘저놈 봐라’ 괘씸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드는데.... 제 스스로도 놀랐어요, 제가 갑질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미치면서, 이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는 즉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얼마 후 3D 애니매이션 제작사에 들어갔다.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3D 애니메이션을 기획하면서, 스토리콘텐츠 매력에 흠뻑 빠지는 계기가 됐다.
아예 그는 미디어 콘텐츠의 핵심은 드라마라는 인식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방송콘텐츠제작사 초록뱀미디어를 만들었다. 인기드라마 ‘올인’, ‘주몽’, ‘선덕여왕’ 등을 기획제작했다. 드라마 방영이 끝난 후 제주 올인 촬영장은 ‘올인 드라마 박물관’으로, 주몽 촬영장은 ‘나주영상테마파크’로 탈바꿈시키는데 산파역할도 했다
“올인은 제주도로부터 3억원의 제작비 지원을 받았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은 제주도로 해서, 카지노를 중심 소재로 삼아 사랑과 운명을 건 대결을 벌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기에, 당시 우근민 제주지사의 관심이 컸습니다. 우 지사의 숙원사업이 강원랜드와 같은 오픈 카지노였거든요. 드라마가 성공을 거두고 난 후 우 지사는 자신이 수십 번 해외에 나가 수십 억원을 들여 관광세일즈를 하고도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쳤는데, 올인 한편으로 100배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고 고마워했습니다.”
그는 웹소설, 웹툰을 포괄한 스토리창작제작사를 독립적으로 만들어 운영도 하고 있다. 미래를 위한 다양한 문화기획의 일환이다. 관장일을 맡으면서는 후배에게 운영을 일임했다.
“아무리 잘 돼도 드라마와 영화는 허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전국구로 여기저기 다녀도 허전하고 공허합니다. 작은 현장속에서 문화가 돈이 되는 문화경제의 모범적 선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안양은 특별한 곳이다.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이미 진행해 오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멋진 문화재나 작품이 있어도, 관람객 대중이 찾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가 지금껏 대중들을 상대로 스토리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유통하면서 닦아온 경험과 감각을 마음껏 쏟아부울 생각이다.
“안양은 문화예술도시로의 의지가 강한 도시입니다. 대표적으로 2005년부터 무려 15년이 넘도록 진행해온 안양퍼블릭아트프로젝트가 대표적입니다. 공장(유유산업)이 있는 안양유원지가 박물관이 있는 문화예술공원으로 탈바꿈했잖아요, 더구나 안양은, 모두들 잊고 있지만, 1950년대 1960년대에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요람 역할을 했던 곳이에요. 신필름이 운영했던 안양종합촬영소가 한국영화를 아시아 최고의 영화시장으로 만들었던 중심축이었지요. 그 전통이 어디로 가겠나요?”
그는 김중업건축가가 설계한 유유산업건물을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으로 리모델링 한 것은 신의 한 수로 여긴다. 특히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전국 유일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것. 내년 김중업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전시와 기념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우선 전문학예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시구성부터 내실화할 계획입니다. 안양박물관도 그렇고 김중업건축박물관도 그렇고, 스토리가 있는 전시구성을 통해 누구나 만족할 만한 콘텐츠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관람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박물관의 규모를 키워야 합니다. 규모를 키운다고 해서 박물관의 공간을 넓힌다는 뜻이 아니고, 작은 박물관 미술관을 도심 곳곳에 세워 시민들의 일상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한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중점을 두고 추진할 과제는 문화경제의 성공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문화를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돈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문화를 통해서 지역경제를 일으키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모델을 만드는 일이지요.”
그는 작은 박물관, 작은 미술관, 작은 도서관이 그 중심축이라 했다. 예를 들어 쇠락해 가는 원도심(구도심)에 20평짜리라도 아주 작은 문화공간이 예쁘게 꾸며진다면, 낡은 것이 뉴트로가 돼 사람들이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실천적 경제학자 슈마허의 역작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되씹게 해준다.
“부천, 군산, 목포,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공공의 역할은 민간이 자연스레 유입될 수 있을 때까지 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입니다.“
그는 이같은 ‘작은 문화공간’운동은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추동력이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지역 오피니언리더 등이 참여하는 박물관 시민포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역문화운동의 성공은 시민이 주체가 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를 일상과 일치시키는 자만이 창조적인 문화를 일궈나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김태원 박물관장이 그렇다. 13년전 드라마 주몽을 사람들이 여전히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스스로에게 ‘잘했어’라고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그에게서 또 다른 문화도시 안양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