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81회
큰 바위 얼굴
평창동으로 돌아온 애춘은 너무도 낯설고 타인의 집 같았다. 그의 집은 이제 애춘을 잊어버린 듯 고요하기만 했다. 채성은 화순 댁에게 애춘을 각별히 부탁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 답답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는 정원의 작은 벤치에 앉았다. 작은 연못 위에 자신의 얼굴이 비추었다. 물 위에 비추인 자신의 얼굴조차 그에겐 낯설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만추의 바깥공기는 꽤 쌀쌀했다. 아니, 채성의 가슴엔 싸늘한 겨울 기운이 감돌았다.
‘난 애춘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죽는다면 그 뒷감당이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다!’
채성은 애춘에 대한 연민이 자신에게 남아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부부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그렇게 나 자신과 맞지 않는 여자라고 부정하면서도 난 애춘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날 애춘과 결혼한 것은 야망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혜란을 자신의 여자라 여기며 모성애의 욕구를 충족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마음은 언제나 떠도는 별처럼 정착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카페로 향했다. 친구 이강석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카페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언제나 늘 앉던 창가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강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석은 아내에 대해서 요즘 심각한 듯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채성은 웨이터가 건네는 냉수를 한 잔 마시고 눈을 감았다. 두 여자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 확실한 무언가를 선택하고 싶었다. 그는 혜란을 떠올렸다.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분석해 보기 시작했다. 혜란은 여자로서 분명 자신을 사랑했다. 그러나 남자의 사랑을 받기보다 야망이 더 큰 여자였다. 마치 자신이 장애춘과 결혼한 것이 야망 때문이었듯이 혜란 역시 목적을 위해서는 야멸찬 여자였다. 그녀의 목표는 여인으로서 아기자기한 일상의 행복에 만족할 여자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최고의 성공을 바라보는 계산적인 여자였다. 채성은 그동안 혜란의 속셈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었다. 사실 혜란은 사업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이기도 했다. 그녀의 사업 브리핑은 언제나 훌륭했고 늘 참신한 아이디어로 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면서 채성은 모성애적 애정이 점점 엷어지고 출세에 집착하는 혜란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영리한 그녀가 어쩌면 회사를 송두리째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그런 불안감이 한쪽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 본성이 드러나듯 채성은 혜란의 이 같은 속셈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를 탐닉하면서도 속셈을 나름대로 탐색하고 있었다. 채성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서 한 여인을 성형중독과 우울증에 빠지게 했고, 다른 한 여자에게는 과대망상적인 꿈을 꾸게 했는데 이것이 두 여자에게 내두른 횡포였다. 다행이 혜란이 참회하는 맘으로 순순히 물러섰다.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애춘과 행복하기를 원했다. 아마도 누구의 후원을 받는 후광을 던져버리고 철저히 새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결심은 참으로 기특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혜란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그녀의 순결을 빼앗아 놓고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채성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콧날이 시큰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애춘에 대한 과오 때문일까? 아니, 혜란도 자신도 모두 불쌍한 인간이었다.
채성은 호텔에서 마주 친 애춘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토록 진지한 면이 있는 애춘을 발견하고부터 채성의 마음은 애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어떠했나! 애춘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함께 앉아 말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오순도순 이마를 맞대고 식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보다 귀찮은 그녀의 질문이나 투정을 피하려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말없이 곧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외면했던 시절이 필름처럼 떠올랐다.
아! 이 죄인. 그것은 지독한 이기심이었다. 책임 없이 행한 지독한 이기심이었다. 그 이기심이 애춘을 절망으로 몰아붙인 것이었다. 채성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처절히 통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