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단지 평범하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말이다. 그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는 무의식과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 초현실주의 거장이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의 작품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27일부터 내년 3월 2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살바도르 달리‘전이다.
전시되는 작품들은 스페인 피게레스에 위치한 달리 미술관(Dali Theatre-Museum)과 미국 플로리다의 살바도르 달리 미술관(Salvador Dali Museum),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에서 가져 온 것이다. 회화, 삽화,설치작품, 영상, 상업광고 등 모두 140여 점을 빌려왔다.
전시는 총 아홉 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예술이 인생을 지배해야 한다는 달리의 신념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천재의 탄생‘ 1섹션에서는 출생부터 남달랐던 달리의 가족과 고향 등 유년 시절의 배경을 소개한다. 당시 유행하던 미술사조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현실주의: 손으로 그린 꿈속의 사진들‘ 2섹션에서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활동한 시기의 작품과 루이스 부뉴엘과 공동 제작한 최초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관람할 수 있다. ’미국: 새로운 기회와 자유‘ 3섹션에선 뉴욕에서의 망명 생활 동안(1930~40년대) 약 40 개의 연극 무대 디자인과 연출을 담당하면서 각종 소품과 의상 디자인 등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할리우드의 영화 연출에도 참여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래픽 아티스트, 이상한 나라에서 온 돈키호테처럼‘ 4섹션에서는 최고의 이야기꾼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삽화와 커버 디자인 등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활약하면서 컬러 수채화와 판화, 에칭 등 다양한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완성한 ’셰익스피어에 대한 소동‘, ’라 만차의 돈키호테‘, ’삼각모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 시리즈가 소개된다.
’나의 영원한 왕국, 포트이가트‘ 5세션에서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으로 돌아가고자 한 달리의 새로운 세계관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시각적 환상에 대한 탐구‘6섹션에선 수학과 과학이론을 그림에 적용시키는 다양한 착시 실험을 접할 수 있다. 이중 이미지,스테레오스코피, 홀로그래피, 4 차원 등과 같이 독창적인 시각적 환상에 대해 탐구를 보게된다.
’영원불멸한 거장들의 천국‘7섹션에서는 피카소와 벨라스케즈,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들에 대한 달리의 깊은 경의를 찾아볼 수 있다. ’달리의 꿈속으로 떠나는 여정‘ 8섹션에서는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달리 미술관을 위해 특별 제작된 실감형 멀티미디어 콘텐츠 ’달리의 꿈 Dreams of Dali‘이 공개된다. 벽면을 에워싼 몽환적인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달리의 꿈속에서 벌어졌을 풍경이 현실에서 펼쳐진다.
마지막 섹션 ’메이 웨스트 룸‘에서는 대표적인 설치 작품’메이 웨스트 룸 Mae West Room‘을 소개한다. 착시가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경험을 전시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는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아티스트와 스타들과 영감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스타성은 그의 남다른 감각과 재치 있는 세계관과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다. 1904년 스페인 카탈루냐의 소도시 피게레스에서 태어났다. 달리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난 형으로 인해 상심한 부모는 달리를 죽은 형의 환생으로 여겼다. 이는 달리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안겼고 죄책감과 강박증, 편집증, 정신 분열 증상인 이중성 혹은 다중성을 갖게 했다. 달리는 온전한 자신으로 인정받길 원했으며, 그 열망을 온갖 기행과 일탈로 표출했다.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웃기, 개미에 뒤덮인 박쥐를 입에 넣기, 망토와 왕관을 쓰고 왕 행세하기, 여자아이를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기, 염소똥으로 만든 향수 뿌리기 등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평생 괴짜 취급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보인 달리는 17살에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조각상을 그리는 정물화 수업 시간에 저울을 그려 주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심사위원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시험지 답안 제출을 거부했다. 그는 과격하고 반항적인 행동으로 결국 퇴학조치를 당한다.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달리는 벨라스케즈, 라파엘로 등 고전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충격을 받아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 심취하게 된다. 무의식과 본능의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달리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다.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산업혁명이 초래한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이 뭉쳐 개척한 사조였다. 하지만 독재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고 자본주의를 좇았던 문제아 달리는 동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끝내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다.
이러한 달리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감싸 안았던 사람은 아내 갈라였다. 10살 연상의 유부녀였던 여인과 사랑에 빠진 달리는 모든 것을 바쳐 청혼했고, 결국 갈라는 이혼 후 달리와 재혼하게 된다. 달리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본 갈라는 그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돌보았다. 달리는 “나의 어머니보다, 아버지보다, 피카소보다, 그리고 심지어 돈보다도 갈라를 더욱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치유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한평생 갈라 만을 사랑했다.
달리는 평생 시달린 불안감과 광기를 독창적인 예술 언어로 표현했다. 대표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기록하는 ‘자동기술법’과 어떠한 사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거나 응시할 때 나타나는 왜곡을 표현한 ‘편집광적 비판’이 있다. 달리는 비이성적인 환각 상태를 객관화하여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정통적인 회화기법과 정밀한 소묘, 오차 없는 원근법을 통해 완성한 몽환적이고 기묘한 그림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달리는 “그림이란 비합리적인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또한 원자 과학이나 DNA,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했던 달리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충격을 받아 '핵-신비주의'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렬한 화면과 정교한 테크닉의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달리는 장르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영화, 사진, 연극, 패션 등 상업적인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영화감독인 월트 디즈니와 알프레드 히치콕과도 협업한 달리는 슈퍼스타 대우를 받았다. 로고를 디자인하고, 광고에 얼굴을 내밀며 예술과 상업 경계를 무너트려 팝아트 탄생의 기반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