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심종완 기자] 14일 방송되는 KBS 1TV ‘KBS스페셜’에서는 ‘시민의 탄생 - 1987’ 편이 재방송된다.
“저희가 앉자마자 경찰관이 책상을 탕 치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거 보세요. 그렇게 깜짝 놀라더니 아들이 쓰러져서 죽었다고... 그게 다였습니다. 상황설명이. 이해가 될 수가 없죠. 어이가 없죠. 그 건강한 동생이 책상 한 번 쳤다고 그 소리에 죽다니 말도 안 되죠.” - 박종철 열사의 친형 박종부 씨
1987년 1월 14일,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던 한 청년이 사망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 박종철이었다. 이 청년의 죽음을 두고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로 해명했지만 부검을 통해 질식사로 사인이 밝혀지며 결국 고문은폐 사실을 시인한다. 고문혐의로 두 명의 경찰이 구속됐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속의 또 다른 진실이 물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 죽음을 둘러싼 진실
“둘이 끌어안고 가라. 그러면 금전적인 부분을 지원해주겠다. 1억씩을 주겠다. 덮어씌우라는 말을 보니까 ‘굉장한 음모가 진행 중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당시 영등포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 씨
“(전달 받은 서신이) 4통인데, 이걸 보면 ‘완전 조작극이다.’ 이렇게 시작이 돼요.” - 당시 청와대 문교수석 김정남 씨
당시 해직기자로 수감 중이던 이부영은 교도소의 보안계장이었던 안유를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부영은 몇 장의 서신을 통해 이와 같은 내용을 세상 밖으로 알리게 되고 박종철 죽음에 대한 진실은 5.18 추모미사가 열리던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전국에 발표된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은폐되고 조작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며 정권을 향한 시민의 불신은 날로 높아만 갔다.
▲ 야욕에 눈 먼 정권을 향한 시민의 분노
“장충단공원에서 투표를 하면 투표율이 99%인가 나왔을 걸요. 북쪽 애들이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런 선거를 했었잖아요. 대통령 간선제라는 게” - 6월 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 천주교 집행위원 이명준 씨
1980년대는 5.18 광주항쟁, 5.3 인천사태, 10.30 건국대 사태 등 전두환 정권의 끊임없는 민주화 세력 탄압으로 모든 것이 억압된 시대였다. 정권유지만이 목표였던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직선제 개헌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하겠다는 호헌조치를 선언하며 거리에 나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던 일반 시민들에 대한 억압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 1987년 6월, 한 청년의 죽음
“우리 한열이 맥박이 콩닥콩닥 뛰는 거에요. 부처님도, 하나님도 우리 한열이 좀 살려주시라고. 눈뜨고 일어나기만 한다면 내가 휠체어 밀고 다니면서 살 테니까 우리 한열이 눈만 뜨게 해달라고 의자에 앉아서 그 소리만 하고 있는 거에요.” -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대회’ 집회에 참여한 경영학과 2학년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과 더불어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건은 시민의 분노를 끌어 올리며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 분노의 폭발, 1987년 6월 10일
“분노가 치밀어 올랐죠. 학생들의 주장이 정당한데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을 받아들여서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폭압한 데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습니다.” - 당시 넥타이부대 박찬호 씨
“항상 도와줬지. 여기 사람들은 다 도와줬어. 어른들은 용기가 없고 젊은이들은 불의를 보면 막 나서니까 도와줄 수밖에 없었지. 자기 아들 딸 같으니까.” - 남대문 시장 상인 정태우 씨
시민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고 차기 대통령 후보지명을 위한 민정당 정당대회인 6월 10일을 디데이 삼아 수많은 시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집회준비를 이어갔다. 1987년 6월 10일,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전국적으로 분노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를 채웠고 그동안 정권을 향해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넥타이부대도 가세하기 시작하며 시위규모는 눈처럼 불어났다. 난사하는 최루탄, 지랄탄에 맞서 싸운 그들은 시위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시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 명동성당은 항쟁의 구심점이 되어 밤부터 이어진 농성은 5박 6일간 지속되었고 이후 민주항쟁의 불씨는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 전국으로 퍼진 민주항쟁의 정신
“아무것도 획득한 것이 없이 이 항쟁이 끝나겠단 위기감이 들었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된다. 부산에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6월 항쟁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자. 이런 생각으로 우리가 바라던 직선개헌이 쟁취될 때까지 여기서 뼈를 묻자는 각오로 시작하게 된 거죠.” - 당시 부산국본 사무국장 고호석 씨
“6월 항쟁이 바로 광주였습니다. 광주의 금남로가 부산에도 생기고 전주에도 생기고 서울에도 생기고 이로 인해 1차적인 5월 항쟁은 완성된 것이다.” - 5월 화가 홍성담 씨
서울에서 벌어진 대규모 집회의 열기는 전국 시·군으로 확산되며 엄청난 규모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명동성당 농성의 열기를 이어받은 부산은 가톨릭센터 일대를 항쟁의 구심점으로 삼고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하여 부산 집회 최대 인원을 모았다. 정권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서려있는 광주에서는 5.18로 억압된 민주시민의식을 일깨우며 전남 도청 일대에서 치열한 시위를 이어갔다. 전국적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노태우는 6월 29일 호헌조치 철회와 대통령 직선제를 선언하며 시민에 굴복했다. 시민의 손으로 일궈낸 승리였다. 시민 한 명 한 명의 힘이 모여 역사의 물줄기를 새롭게 바꿔놓는 순간이었다.
▲ 6월 항쟁, 시민의 승리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너무나 기뻤고 정말 우리가 그동안 싸웠던 것. 도망다니면서 새벽이슬 맞으면서 싸웠던 모든 것들이 봄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 민중화가 전정호 씨
“시위를 해봤자 앞장 선 사람만 죽고 다치지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패배의식이 일제, 해방, 한국전쟁, 4월 혁명의 과정을 거쳐 우리 사회 속에서 DNA처럼 박혀 있었는데 일반 국민들의 승리의 가능성을 보게 된 거고 승리의 가능성이 점쳐지는 순간 스스럼 없이 용감하게 같은 시민이 되는 거죠.” - 상지대학교 정대화 교수
전국적으로 퍼진 6월 항쟁의 열기는 시민들의 피땀으로 일궈낸 값진 승리의 열매였다. 우리는 직선제 쟁취, 헌법재판소 설치 등 절차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되었다. 6월 항쟁 30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다시 불의한 정권에 맞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섰다. 민주주의 후퇴를 막고자 했던 시민의 힘을 이어 받아 우리는 다시 광장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KBS 1TV ‘KBS스페셜’은 14일 오후 7시 10분에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