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당신의 시선으로' , 작가의 작품제목이 우선 눈길을 끈다.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Maud Lewis,1903~1970)의 삶을 다룬 영화 ‘내 사랑’의 대사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관절염으로 몸까지 불편했지만 순박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 모드 루이스. 그림 그리는 일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했던 모습은 정현재 작가와 닮았다.
영화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불통의 생선장수와 연을 맺고 사랑의 소통을 해 나가는 모드 루이스에겐 그림이 피를 흐르게 하는 도구였다. 유일한 지지자는 생선가게 고객이었다. 그림을 주문하고 주위에 알렸다.
“유일한 주문 조건은 ‘당신의 시선을 보고 싶다’였지요. 누구나 자신의 시선이 있게 마련입니다. 누가 봐도 당신의 시선은 내 시선일 수 있고 모두의 시선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술의 가장 큰 미덕은 마음의 피를 흐르게 하는 것이다. 정서와 생각의 소통이 마음의 피다. 전시장에서 종종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다. 작품을 접하는 순간 마음의 피가 흘렀던 것이다.
“저는 마흔의 중반을 넘어 붓을 잡았습니다. 가슴으로 담아낼 수 없는 사연이 많아질수록 붓을 놓을 수 없었지요. 철부지 어린 소녀의 꽃 같은 소망이 실현되는 날, 저는 이미 행복했습니다. 붓을 잡는 순간 이미 꿈을 이루었으니까요. 붓이 스친 자리엔 흔적이 남고 영겁의 시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새겨집니다. 제가 그랬듯이 많은 분들이 그림을 통해 마음의 피가 넘쳐흘렀으면 합니다.”
작가는 한때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집을 짓고 남은 목재였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듬어서 만들기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나무판자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보면 만지고 붙이고 그리고 살았지요. 뭘 그려야 겠다는 것도 없었어요. 캔버스 위에 흙과 커피가루를 올리고 쌓으면서 의도치 않는 형상이 나오면 재미를 느꼈지요.”
그는 차차 이런 모습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 깨닫는 순간 우울증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고 마음의 피가 흐르게 하는 원동력임을 절감했다.
“그냥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심심하고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키친타올을 붙여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도 즐기고 있습니다. 흙과 커피가 만들어 내는 연탄재 같은 질감도 매력적이고요.”
그는 바탕 작업에만 두어 달의 공력을 쏟는다. 질감이 주는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더하려 종이와 커피 등 여러 가지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말리고 그 위에 수없이 얹고 말리고를 반복하며 완성에 가까운 바탕을 만든다. 어느 순간 의도한 것과 의도치 않은 것의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놓는다.
매체와 양식, 기술과 표현 사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작의 본질을 추구하는 창의적 실험은 20세기 초반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다양한 이미지를 조합하고 합성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정현재 작가는 표현영역을 사실의 묘사와 재현에 국한하지 않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내고 있다. 일상의 경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창의적 표현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정현재 작가는 이제 자신의 화폭에서 우주와 어린왕자를 떠올리고 있다. 우리는 외부에서 온 메아리 이상의 것, 무한에의 내밀한 부름에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작가의 마음속에서 우주의 은혜로운 노랫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저 모든 별들이 네 거야, 그것들은 네 안에 있단 말이야! 라고 외치고 있다. 최상급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실제적인 것을 떠나 상상적인 것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시인과 예술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제 정현재 작가의 아주 먼 그곳으로 항해가 시작됐다.
정현재 작가의 개인전이 20일부터 24일까지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1층에서 열린다. 새농촌문화포럼이 역량있는 지역작가를 발굴 육성하는 차원에서 마련한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