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配慮)란 무엇일까요? 사전에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배려심이라는 것이 어렵고도 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지요.
조선 영조(英祖)시대 부정한 관리를 적발한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은 정치가였던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 : 1691~1756)의 일화 중,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친척 집에 잔치가 있어 밤을 새웠다가 다음날 일어나서 세수를 하기 위해 박문수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바로 앞서 세수를 하던 친척의 행동에 박문수가 불쾌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에는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문화로 내 것 네 것 구분이 별로 없었고, 생활도 넉넉지 못해 세수 후에 사용되는 수건은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한 곳에 걸어놓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수를 마친 친척이 여러 사람이 써야 할 수건을 혼자서 온통 다 적셔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수건이 젖어버리자 박문수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옷으로 얼굴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그 친척이 평안 감사로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그러자 박문수는 임금님에게 이렇게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는 친척이기 때문에 반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는 평안 감사 감이 되지 못합니다.” 이 말과 함께 세수 후 남을 배려하지 않고 혼자서 수건을 사용하던 일을 예로 들어 말했고, 임금은 박문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친척의 평안 감사 제수를 취소했습니다.
어사 박문수의 친척은 수건 한 번 잘못 사용한 것을 두고 평안 감사가 될 수 없다는 일에 억울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사 박문수는 사소한 배려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평안 감사로 가게 되면, 백성들에게 어떻게 행동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임금께 간언을 올린 것입니다.
배려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은 말과 행동을 통해 평가하기 때문에 배려는 ‘인격이 입는 옷’이라고도 합니다. 그럼 진정한 배려는 어떤 것일까요? 그 예를 ‘만종’을 그린 ‘밀레’와 사상가 ‘루소’의 얘기에서 찾아봅니다.
해 질 녘 농부가 수확을 마치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 바로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유명한 이미지입니다. ‘밀레’는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화가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그림이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그림을 눈여겨봐 왔던 것은 평론가들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사상가 ‘루소’였습니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 가난에 허덕이던 ‘밀레’에게 어느 날 ‘루소’가 찾아왔습니다. “여보게,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네.” ‘밀레’는 친구 ‘루소’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밀레’는 작품을 팔아본 적이 별로 없는 무명 화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보게, 좋은 소식이 있네. 내가 화랑에 자네의 그림을 소개했더니 적극적으로 구입 의사를 밝히더군, 이것 봐, 나더러 그림을 골라 달라고 선금을 맡기더라니까.”
‘루소’는 이렇게 말하며 ‘밀레’에게 300프랑을 건네주었습니다. 입에 풀칠할 길이 없어 막막하던 ‘밀레’에게 그 돈은 생명줄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고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밀레’는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었고, 보다 그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지요.
몇 년 후, ‘밀레’의 작품은 진짜로 화단의 인정과 호평을 받아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된 ‘밀레’는 친구 ‘루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루소’가 남의 부탁이라면서 사간 그 그림이 ‘루소’의 거실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밀레’는 그제야 친구 ‘루소’의 깊은 배려의 마음을 알고, 그 고마움에 감동의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가난에 찌들어 있는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사려 깊은 ‘루소’는 남의 이름을 빌려 ‘밀레’의 그림을 사주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진정한 배려’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배려는 개인 간의 우정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나 국가 간에도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모순이 왜 생겨나게 될까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사랑의 마음이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에게 아픔과 상처가 만연되어있는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메마른 이 사회에서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의 바람이 불어 올 것입니다.
원불교의 교리에 <강자약자 진화상의 요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있어야 하지만, 경쟁에서 낙오된 절대 약자는 강자들의 배려로 살려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강자와 약자가 서로 어울려서 보살피고 살갑 게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 그것이 덕화만발이 지향하는 배려의 세상이 아닐 런지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12월 2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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