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이 한 권의 책을,. 소개
어느새 우스개로 다가오지만,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고 내내 부르댄 정치인이 있다.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농민과 노동자가 '법질서'를 지키는 공권력에 맞아죽은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당시 이른바 '야당' 대표였던 그 정치인은 되레 자신이 집권하면 '흔들리는 법질서부터 바로 세우겠다'고 호언했다.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당선되는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고, 불법 선거 자금 혐의까지 불거졌다. 그럼에도 당사자인 박근혜는 물론, 법질서를 바로 세우자는 데 용춤을 추어온 독과점 언론사들도 언죽번죽 시치미를 떼고 있다.
생게망게한 나라꼴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주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님을 사무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적잖은 이들이 실망을 넘어 좌절하고 있는 까닭이다.
절망이 감도는 '진지'를 재구축하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우리에게 '무기'가 될 책이 나온 것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다. 신간 <민주주의 헌법론>(아카넷, 2015년 4월 펴냄)은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고 부르대는 정치인들, 그들 앞에 헌법 제1조를 외친 주권자들이 두루 정독해야 할 책이다. 전자에게는 성찰의 기회를 주고, 후자에게는 주권 실현의 무기가 될 이 책의 저자는 '명망'을 좇는 사람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법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그것을 사회에 구현하는 데 앞장서온 학자들에겐 명성 높은 스승이다.
인하대학에서 헌법학을 강의하며 대학원 안팎에서 숱한 법학자를 길러낸 국순옥 명예교수(이하 저자)는 '민주법학의 스승'이자, 그 '민주주의법학연구회'가 올곧게 '법학운동'을 펴나가는 길에 변함없는 나침반이다. 법학자들 사이에 저자의 논문들은 "언제나 치열하게 벼려낸 논리를 꼼꼼히 다듬은 문장으로 빚어낸 명문"으로 회자된다. 바로 그 명문들을 제자들이 모아 <민주주의 헌법론>에 담았다.
'민주법학의 스승'이 주권자들에게 건네는 '무기'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저자의 글은 '민주주의와 헌법 실천' 들머리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 헌법은 자본주의헌법의 계보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 헌법은 근대자본주의헌법의 자유주의적 기본틀은 물론 현대자본주의헌법의 개량주의적 성과들도 아울러 담고 있다."
두 문장이지만, 헌법에 대한 우리의 접근 수준을 단숨에 높여준다. 대한민국 헌법이 '자본주의 헌법의 계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환기시켜줄뿐더러 '자유주의적 기본 틀'은 근대 자본주의 헌법이고, 현대 자본주의 헌법은 그것을 넘어서려는 '개량주의적 성과들'을 담고 있다는 진실을 깨우쳐준다. 이어 개량주의적 성과들 또한 "투쟁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근대자본주의헌법과 현대자본주의헌법은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는 이질적 범주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성립한 자본주의헌법의 역사적 현상형태들에 불과하다. 근대자본주의헌법이 신흥부르주아계급의 주도 아래 전개된 반봉건투쟁의 산물이라면 현대자본주의헌법은 노동자계급이 선봉에 선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다."
그 맥락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자본주의헌법의 담지자인 부르주아계급이 미처 성장하기도 전에 몇몇 강단 출신 지식인이나 관료 출신 지식인이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헌법을 밑그림 삼아 이리저리 엮어놓은" 것으로 "1948년의 우리 헌법은 우리 현실과 거리가 먼 일종의 초현실주의 추상화나 다름없었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왜 제1조부터 철저히 무시당해 왔는가를 직시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긍정적 의미를 평가하는 데 인색하진 않다. '강단 헌법학 비판'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격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반쪽 해방 공간에서 적지 않은 산고 끝에 태어난 1948년 헌법이 진보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고 분석한다. "진보주의 이념을 떠받쳐주는 사회변혁적 해방 잠재력이 아직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 "민주주의적 계몽 기획으로 우뚝 서야 할 1948년 헌법이 걸어간 길"은 아쉽게도 진보주의 이념을 하나씩 털어내는 "고난의 행진"이었다.
저자는 단순한 법학 교양을 넘어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새 지평을 열어준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손꼽을 것"으로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의 내발적 추동력인 부르주아계급의 원초적 결락 현상"을 든다.
혹 '부르주아계급'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기 검열이나 '경계'에 들어갈 독자를 위해 서평자가 '각주'를 달고 싶다. 부르주아는 서구의 시민혁명을 일으킨 계급으로 말뜻 그대로는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토지에 기반을 둔 중세 시대에 상인과 공인들은 성 안에 살았다. 그들 "근대자본주의헌법의 담지자인 서구의 신흥부르주아계급은 그 뿌리가 봉건사회 해체기의 독립 자영 소생산자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건사회의 신분적 질곡으로부터 해방된 이들 독립 자영 소생산자층은 반봉건투쟁에서 몸과 마음을 다진 자유의 전사로서 평등 그리고 독립의 인격주체로 홀로서기를 열망한 자유주의 이념의 고전적 화신들이었다. 그들은 신흥부르주아계급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근대자연법이론의 세례를 통하여 이념적 자기 정립과 윤리적 자기 도야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밑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부르주아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빈 공간을 채운 것은 "국가 주도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 전략의 그늘 아래에서 양적 성장을 거듭한 천민부르주아계층"이다.
서구 부르주아계급과 달리 한국의 천민 부르주아층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미래를 주체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정치적 상상력이나 윤리적 지평조차" 기대할 수 없다. 그 차이는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어떤 성명을 내놓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 스스로 신분제도에 맞선 혁명의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한국의 상공인계급은 "근대자본주의헌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헌법의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대 냉소주의적 무관심을 보이거나 국외자의 입장에서 시종 방관자적 자세를 보였다.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유리한 군부독재에 대해 그들의 태도는 '방관자'를 넘어선 '부역자'였다. 비단 과거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오래 역임한 박용성이 대학 이사장이 되어 강행한 '기업식 학사 개편'에 교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 놓은 것은 저들이 얼마나 천민적인가를 2015년 오늘에도 생생하게 입증해준다.
근대 자본주의 헌법의 고갱이에 대해서도 무지한 한국 상공인들이 현대 자본주의 헌법의 개량주의적 성과인 사회권적 기본권을 어떻게 여길지는 불을 보듯 명확하다. "천민부르주아계급의 자본 축적 활동과 모순관계에 있는 노동 관련 기본권에 대한 적대적 반응"이 그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이 노동 관련 기본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삼성의 경영을 '위헌'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천민 부르주아층의 인식이 이미 한국 사회에 폭넓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 부재의 헌법"으로 출범한 헌법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무릇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일차적 관건이다. 이 책은 우리의 헌법 현실과 헌법 실천을 날카롭고 깊이 있게 제기한다. "자본주의헌법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자본주의헌법의 담지자인 부르주아계급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주체 부재의 헌법으로 출범"한 "헌법 현실에서 헌법 실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사회적 실체를 탐색하는 것은 이 책의 실천적 미덕이다.
그 "헌법 실천의 주체"에게는 이중의 과제가 놓여 있다. "우리 헌법이 담고 있는 현대자본주의헌법의 개량주의적 성과들을 사회 발전의 디딤돌로 지켜나가는 것"과 "천민부르주아층을 대신하여 우리 헌법의 자유주의적 기본틀을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더욱 다져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저자는 개념적 인식이 사고의 지평을 얼마나 확대해주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대안 헌법 이론'에서 "1987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 실천 주체들의 등장"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 뒤 전개된 현실에 저자의 분석은 냉철하다.
노동자계급이 헌법 현실에 발 딛고 스스로 헌법 실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찾은 저자는 "헌법 실천 주체의 외연이 생산활동 영역의 노동자에서 생산활동 영역 밖의 노동자로 확대된"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까지 단결권의 행사가 금기시되어온 사회 각 생활영역, 예컨대 교육현장 언론매체 의료사업장 등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조직 열기가 한껏 고조"되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뒤를 이은 김영삼 정권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탈을 쓰고 억압적인 노동정책을 폈고, 1997년 끝 무렵 밀어닥친 "금융환란의 무거운 짐을 노동자계급이 고스란히 떠안음으로써 모처럼 물오르기 시작한 노동자계급의 헌법 실천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았다고 분석한다.
헌법 실천의 또 다른 주체로 제시한 학생운동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냉엄하다. "대학생 활동가 집단들의 관념적 급진주의"가 "우리 헌법 현실은 묶음표에 가두어놓고 추상적 관념의 세계에서 유리알놀음을 즐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는 비판은 사뭇 서슬 푸르다. 저자는 "우리 헌법 현실의 뒷전에서 이념 과잉의 공상헌법 수필만 엮어내는 데 골몰"하기보다 "우리 헌법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분석의 결과를 헌법 실천적 대안으로 구체화"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시민운동이 헌법 실천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스스로를 무계급 또는 초계급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시민운동 특유의 허위의식"을 지적한다. 그 결과로 "시민운동 단체들의 헌법 실천적 개입에서 부르주아적 생활세계의 중심 무대인 소비생활 영역의 기본권이 주로 호명의 대상이 되고 생산활동 영역과 관련된 기본권이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분석한다.
"시민사회적 기본권 민주주의는 근대화 기획의 첫걸음" 헌법 실천의 주체로 노동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을 짚은 저자는 "민주주의를 기본권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기본권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시민사회적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중심이 되는 기본권은 기본권 일반이 아니라 기본권 담지자 시민들의 사회적 교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사소통의 자유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사소통의 자유는 지배적 기본권 담론에서도 역시 대문자 주제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표현의 자유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언론 및 출판의 자유와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포함된다. 이처럼 시민사회적 민주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고리로 시민사회적 기본권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전진을 계속할 때, 우리는 마침내 근대화 과정의 문턱에서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적 기본권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아직도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는 근대화 기획의 첫걸음으로 자리매김하여도 좋을 것이다."
다만, 기본권 중심의 민주주의 사고가 지나친 나머지 탈민주주의적 "기본권 물신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자기 한정"이 필요하다는 경계도 잊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헌법 실천', '강단 헌법학 비판', '대안 헌법 이론' 중심으로 짚어보았지만, 풀어쓰면 각각 책 한 권이 될 수 있는 주제와 내용을 압축적으로 서술한 논문들이 가득하기에 갖춰두고 틈틈이 정독하기 좋을 책이다. 예컨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수직적 심화"와 "수평적 확장"을 제시하는 저자의 차분한 제안은 '헌법 실천'에 나설 때 유념할 개념이다. '사법권력'과 '사회국가'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우리 의식을 고양시켜준다. 민주 시민은 물론 언론인과 법조인들이 탐독해야 할 이유다. 로스쿨과 법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훌륭한 학습 교재다. 강단 헌법학을 비판하고, 대안 헌법 이론을 제시한 저자의 책에는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헤겔, 칼 슈미트,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상을 깊이 있게 분석한 논문들이 실려 있다.
내용과 문체가 두루 빼어난 저자의 명문들을 책으로 펴내는 데는 민주법학 후학들의 힘이 컸다. 실무를 맡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김종서 편집위원장은 책 들머리에서 "몇 년 전 연구소로의 전환 시도가 뜻하지 않은 난관으로 좌절된 이후 상당히 정체되었다고 할 수 있는 민주법연"에 이 책의 출간이 "어떤 신선한 활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민주법학이 '좌절된 뜻'을 이참에 구현한다면, 그것은 법학자들만의 진지는 아닐 성싶다. '법대로'를 외마디로 질러대는 이 '불법 공화국'에서 희망을 만드는 참호 아닐까.
손석춘 건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