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석 칸(khan) 사장(50)의 지갑에 새겨져 있는 좌우명이다. 손때 묻고 귀퉁이가 닳은 지갑이지만 이 글귀만큼은 선명하다. 그는 이 좌우명대로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한발 먼저 들어섰고, 남들이 팔지 않는 제품을 먼저 팔았다. 그렇게 12년. 그가 세운 칸은 폴란드 최대 섬유 무역업체가 됐다.
칸은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한국 등에서 원단을 수입해 폴란드 의류업체에 판매한다. 여성용 원단을 주로 취급한다. 칸이 공급한 원단으로 만든 옷은 폴란드뿐 아니라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 전역에 팔린다. 최문석 KOTRA 바르샤바 무역관장은 “동유럽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칸의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남종석 칸 사장은 바르샤바 본사에서 “해외에서 창업할 때 중요한 것은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의지와 실천”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
↑ 남종석 칸 사장은 바르샤바 본사에서 “해외에서 창업할 때 중요한 것은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의지와 실천”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
폴란드 최대 섬유 무역업체로 성장
남 사장은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에서 회사 이름을 따왔다. 칭기즈칸의 기동력을 닮고 싶어서였다. 폴란드 섬유 무역시장에서 칸의 비중은 약 30%다. 부동의 1위다. 작년 매출은 1800만달러(약 196억원)다. 매년 새로 취급하는 원단 종류는 400여종에 이른다. 칸이 한 해 동안 파는 원단 길이만 평균 4000㎞다. 2003년 설립 후 총 4만8000㎞를 팔았으니 지구 한 바퀴 길이(4만75㎞)를 넘는다.
폴란드 업체를 비롯해 수백개 섬유 무역업체가 난립하고 있는데도 칸의 점유율이 줄지 않는 건 맞춤형 원단 공급과 십수년째 쌓아온 신뢰 덕분이다. 한 지역에서 대량으로 원단을 사와 여기저기 싼값에 파는 다른 업체와 달리 칸은 유행을 미리 파악하고 업체별 특성에 맞춰 원단을 공급한다. 아무리 인기있는 디자인이라도 같은 원단을 동시에 여러 업체에 팔지 않는 것도 남 사장의 철칙이다.
이 덕분에 폴란드 의류업계에서 남 사장은 ‘신뢰남(trust nam)’으로 불린다. 그는 “넓고도 좁은 시장이라 같은 원단의 제품을 경쟁업체가 취급한다는 게 알려지면 10여년 거래한 업체라도 한순간에 등을 돌린다”고 말했다.
맞춤형 판매와 우직함으로 승부
남 사장이 처음부터 창업을 꿈꿨던 건 아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에 입사해 임원을 꿈꾸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선경(현 SK네트웍스)이었다. 14년을 묵묵히 일했다. 원단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던 시기였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뒤흔든 건 1994년 첫 출장이었다. 독일에서 열린 박람회에 가던 도중 시장 조사를 위해 폴란드에 들렀다. 우연히 만난 폴란드 의류업체 구매 담당자와 2만달러어치 계약을 맺었다.
“첫 출장에서 계약을 따오자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그 기분을 잊지 못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폴란드 지사를 설립하더라고요.” 남 사장은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폴란드 원단 시장을 주름잡고 있던 인도 상인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다. 사회주의 시절부터 폴란드는 동유럽의 봉제 기지였다. 원단은 수입에 의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단 제작 기술이 좋았던 유대인이 떠나면서다. 자금력을 갖춘 인도 상인들이 폴란드에서 수입상 자리를 꿰찼다. 한국 원단도 다수였다. “한국 원단 수입을 인도 상인에게 맡기기 싫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을 맺은 폴란드에서 6년을 밤낮없이 일했다. 불혹을 앞둔 2003년 고민이 생겼다. 해외 사업 재정비 과정에서 폴란드 지사가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뭔가 아쉬웠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사업가 체질인데….” 심장이 뛰었다. 온실의 비닐을 걷어내고 제대로 비바람을 맞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 사장은 그대로 사표를 내고 칸을 설립했다.
임대집 다락방에서 1500만원 들고 시작
처음엔 모든 게 돈이었다. 사무실을 얻는 것도, 업체 홍보도 그랬다. 손에 쥔 돈은 1500만원뿐이었다. 33㎡의 임대집 다락방에 사무실을 차렸다. 아래층에는 가족들이 살고 다락방에서 폴란드인 여직원 한 명과 일했다. 의류업체 구매 담당자들과 다락방에서 붙어 앉아 계약 얘기를 했다.
달라진 건 근무 여건만이 아니었다. 대기업 후광 효과가 사라지니 철저히 혼자 뛰어야 했다. 온갖 의류 관련 행사는 다 참석했다. 얼굴을 익히고 명함을 돌렸다. 무턱대고 의류업체를 찾아가 수입한 원단을 소개했다. 안면이 있던 의류업체조차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계약을 바꾸려 했다. 원단부터 받고 대금은 나중에 결제하는 식이었다.
남 사장은 “몇 년씩 거래하던 의류업체들이 표정을 싹 바꾸니 눈물이 날 정도로 서운하더라고요. 외상으로 원단을 공급한 의류업체가 잇따라 부도났을 땐 정말 끝이구나 싶었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궁지에 몰리니 새 시장 보여”
궁지에 몰리니 오히려 새로운 시장이 보였다. 전에는 챙기지 못했던 소규모 의류업체부터 집중 공략했다. 원단 수입 대상에서 제외했던 중국도 눈에 들어왔다.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무역업체들은 중국 원단을 쳐다보지 않았다. 체계적인 샘플 관리가 안 돼 있는 데다 제대로 된 서류도 없었다. 중국 원단업체들은 포장 없이 원단만 둘둘 말아 팔기 일쑤였다. 남 사장은 중국 원단에서 기회를 봤다. 무역 마인드는 부족하지만 잠재력이 느껴졌다.
그는 중국 원단을 처음으로 수입해 폴란드에 선보였다. 첫 반응은 좋지 않았다. 남 사장은 중국 원단업체에 노하우를 전수했다. 판매 시스템과 포장 기술을 알려줘 제품의 질을 끌어올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업체들과 신뢰도 쌓였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폴란드 섬유시장의 상당 부분은 중국 원단이 잠식하게 됐고, 창고에서 원단을 팔던 업체들은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됐다. 중국 원단시장을 개척했던 남 사장은 어느새 ‘중국통(通)’이 돼 있었다.
남 사장의 고민은 앞으로의 성장 동력이다. 의류용 직물에서 벗어나 도로용 직물과 보트·비행기 등 특수 직물시장 진출을 고민 중이다. “사업을 다각화한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시장에 뛰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벽돌을 쌓는 기분으로 하나씩 하나씩 꾸준히 준비해 새 사업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