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7월" 제각각…내년 예산편성·선체조사 여부에 영향
[서울=연합통신넷, 김현태, 심종완기자] '지금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활동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닐까요?'
출범 준비 때부터 진통을 겪은 특조위의 공식 활동 개시일이 언제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조만간 그에 대한 결론이 나올 것으로 보여 논란이 예상된다.
25일 특조위 등에 따르면 특조위는 다음 달 중에 기획재정부에 내년도 특조위 예산안을 제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전에 특조위 활동 시작 시점을 정해야 한다.
세월호 특별법 7조는 위원회 활동 기간을 '구성을 마친 날'로부터 1년 이내로 잡고 위원회 의결로 6개월 이내로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특조위에 보장된 세월호 참사 조사 활동 기간은 최장 1년6개월인 셈이다.
특조위 활동 개시일이 언제인지 결론나야 내년 예산안에 이를 반영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특조위의 활동 기간이 시작된 시점에 대한 의견은 너무 분분하다.
특별법 시행일인 올해 1월 1일이라는 주장과 위원들이 임명된 3월 초라는 주장, 시행령이 공포된 5월 11일이라는 주장, 민간 조사위원들이 임명돼 인적 구성이 마무리되는 7월 중순이라는 주장 등 다양하다.
특조위 활동이 1월 1일 시작됐다고 보면 내년도 예산은 최대 6개월치만 신청할 수 있다. 활동 개시 시점을 3월 초로 잡는다고 해도 내년 예산안은 최대 9개월치 이내에서 편성해야 한다.
이와 관련,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은 18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출석해 "특별법 시행일인 1월 1일부터 임기와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에 특조위는 위원도 제대로 임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기간이 시작됐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반응이다.
특히 상임위원들 사이에서는 민간 조사위원들이 충원돼 공식적으로 출범식을 열어야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7월설'이 우세한 상황이다.
특조위 활동기간에 대한 논란은 세월호 선체 인양 시기와 미묘하게 얽혀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해수부 세월호 선체인양추진단은 인양 완료 시기를 내년 10월로 잡고 있다.
특조위 활동이 1월 또는 3월에 시작한 것으로 결론나면 특조위는 세월호 선체 조사를 하지 못하고 조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5월 11일로 잡는다고 해도 선체 조사를 할 수 있는 기간은 1개월 안팎에 불과하다.
한 특조위 관계자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세월호 선체를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활동을 접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만약 활동기간 때문에 선체 조사를 못 하는 상황이 온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5월. 설렘이 가장 많고 즐겁고 행복했던 달이다. 친구 생일, 어린이날, 어버이날, 현장체험학습, 체육대회(줄넘기 1등!)… 그리고 자리를 옮겼는데 좋아하는 애의 대각선 뒤이다. 말도 많이 해보고 진짜 행복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기다려진다."(2011년 5월, 중2 때)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속이 한결 깊어졌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우리 가족을 책임지고 싶으니까"라고 맘을 다잡더니 "2014년 나의 목표는 문과 1등"이라고 목표를 세우는 믿음직한 딸이었다. 승희의 마지막 편지는 수학여행 떠나던 날 아침, 소파 위에 남겨둔 쪽지였다.
"안녕~ 오늘 제주도로 가는 승희예요. 내가 수학여행 가는 것 땜에 일주일간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승희 비위 맞추려고 애쓰고 챙겨줘서 정말정말 고마워요…. 재밌게 놀다 올 테니 혹시나 전화 없다고 걱정하거나 서운해하지 마~♡ 3박4일 재밌게 놀다 올게! 그리고 갔다 오면 열공빡공 해야지. 나 없을 동안 셋이 재밌게 보내. 사랑해."(2014년 4월15일)
그러나 승희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는 딸이 왜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해가 바뀌어 다시 봄이 왔지만, 그날 이후 일분일초가 어미에겐 심장을 대팻날로 깎아내듯 가혹한 형벌의 시간이었다. 지난 12일, 세월호 희생자 신승희의 엄마 전민주(44)씨를 경기도 안산의 자택에서 만났다. 그도 작년 4월까지는, 유리가공업을 하는 동갑내기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두 딸을 키우던 평범한 주부였다.
승희가 떠난 뒤 도착한 포미닛 댄스의상
승희와 두살 위 언니가 같이 쓰던 침실과 공부방은 원래 있던 그대로이다. 손때 묻은 참고서와 노트 사이로, 승희의 마스코트 같은 작은 토끼인형이 놓여 있고, 아기자기한 액자 안에 다섯살 승희부터 열일곱살 승희까지 큰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 방 볼 때마다 옛날 생각 많이 나시겠어요.
"여기 앉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요. (눈물이 주르르) 이렇게 살아지는 게 너무 이상해요. 어떻게 이렇게 살아지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눈앞이 캄캄하고 오늘 하루는 어떻게 가야 되나. 어떤 때는 하루라도 냉정하게 애를 잊고 싶을 때가 있어요. 너무 힘드니까. 근데 눈감아도 생각나고 새벽에 눈떠도 생각나고. 승희가 마지막까지 엄마한테 뭐라고 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갔을까. 마지막까지 꼭 구조될 거라고 믿었던 애가 순식간에 잘못된 거잖아. 그것만 생각하면 아이고 (한숨) 어떻게 해야 되나 답이 없고."
-승희가 공부를 잘했나 봐요. 모범어린이 표창장, 만화그리기, 체력왕, 영어독후감대회, 수학과학탐구대회 최우수상…. 상장이 많네요.
"승희는 어렸을 때부터 야무지고 말도 좀 빨랐어요. 생일도 1월이라 일곱살에 학교를 보냈어요. 꾸준히 공부를 잘했는데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중학교부턴 성적이 쭉 올랐죠."
상장과 표창장이 스크랩북을 하나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마지막에 받은 상장은 안산시에서 한 학교에 한 명씩 성적 우수자에게 주는 '애향장학금' 증서였다. 엄마아빠 결혼 20주년을 축하한다고 승희는 그 장학금을 엄마아빠 여행경비로 쓰라며 내놓았다.
"To 사랑하는 우리 엄마
엄마아빠 안녕, 오늘은 4/6 결혼기념일이지? 딸들이 모를 줄 알았어? 티 안 내려고 노력했는데~ ㅋㅋㅋ 승희는 공부도 그렇지만 지금 제주도 가는 것 때문에 정신없다. 엄마아빠가 비싼 돈 주고 보내준 만큼 엄청 신나게 후회 없이 놀고 올게! 나 없어도 3일만 참으슈. 그리고 내가 사야 할 걸 몰아서 사지만 그동안 사려던 걸 미뤄서 그렇게 된 거야. 꼭 필요한 것들이니까 이번만…쫌 지를게! sorry~ 제주도 갔다 와서는 공부만 할 거니까 걱정 마~ 오늘 결혼기념일 정말 축하해!~♡ 사랑해! From 승희 (부족한 돈이지만 그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승희가 뭘 사고 싶었나 봐요?
"수학여행 가서 '포미닛' 댄스 할 거라고 반 친구들이랑 며칠 동안 올림픽경기장 앞에 가서 연습도 했어요. 그때 입으려고 인터넷에서 의상을 주문하겠다는데, 내가 그 사정도 모르고 왜 인터넷(쇼핑) 남발을 하냐고 미루다가 하루를 넘겼지요."
승희 노트엔 댄스의상을 꼼꼼히 체크하고 그려놓은 그림이 있었다. "불량소녀 컨셉, 맨투맨 플러스 청조끼." 주문이 지체되는 바람에 상품은 승희가 수학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결국 그 옷을 입어보지 못했네요.
"수학여행 전날 저녁까지 택배가 안 와서 밖에 데리고 나가 비슷한 걸 사줬어요. 근데 수학여행 가는 날 저녁에 택배가 왔더라고. 사고가 나고 보니까 그게 너무 미안한 거예요. 장례 치르고 와서 열어보니 정말 예쁘더라고. 그걸 입고 장기자랑 하고 싶어했는데…. 그게 미안해서 오일 장례 치르고 그 옷을 태워줬어요. 그걸(옷) 사진 찍어놓기라도 할걸."
엄마는 모든 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일곱살에 학교만 보내지 않았더라면, 승희가 원래 가고 싶어하던 고등학교가 집에서 멀고 위험하다고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엄마 탓인 것 같아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다.
"일주일간 예민하게 굴어 미안
수학여행 다녀온 뒤 열공빡공할게"
편지 남기고 돌아오지 못한 승희
그날 이후 일분일초가 어미에겐
심장 깎아내는 형벌의 시간이었다
"애들 죽은 거 다 잊고
돈 많이 받을까봐 그러나요(오열)
억만금 줘도 안 바꿔요 절대로!
김치에 밥만 먹어도 행복했어요
내 새끼 없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죠?"
"엄마 걱정 마, 구조하러 온다니까"
-수학여행 떠난 뒤 승희랑 처음 통화한 게 언제지요?
"15일 날 학교 가서 수업하고 오후에 인천으로 떠났는데 저녁에 전화가 왔어요. 안개가 껴서 수학여행 못 갈지도 모른다고, 지금 대기 중이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그랬어요. 그냥 안 갔으면 좋겠다고. 불안하고 걱정된다고. 그랬더니 '엄마, 걱정 마. 지금 선장이랑 선생님이랑 다 모여서 회의하고 있어' 그래요. 그러고 얼마 후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지금 출발한다고. 그때가 8시 반이었던 것 같아."
원래 승선하기로 한 배는 '오하마나호'였는데 그게 세월호로 바뀐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짙은 안개로 출항 예정 여객선들이 모두 운항을 포기한
날 밤, 오직 세월호만 출항을 강행한 이유도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리고 16일날 아침에 다시 통화를 하신 건가요?
"내가 출근하고 얼마 안 되었을 시간이니 아침 9시쯤인데. 그때까지도 목소리가 밝았어요. '제주도 벌써 도착했어?' 하니까 '아니야 엄마, 한 시간 정도 더 가야 해' 그래서 밥 먹었냐고 물으니 밥 먹고 다 씻었다고 그러더라구요. 도착하면 전화하겠다고 하면서…."
-이상하네요. 8시48분대에 급선회가 있으면서 배가 기울기 시작했고 8시51분엔 최덕하 학생이 119에 신고전화도 했는데, 그때까지 승희가 그걸 감지 못 했단 건가요?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근데 승희만 그런 게 아니라 9시 무렵에 통화한 다른 사람들 중에도 애들이 그때까지 별말 없었단 얘기가 있어요."
-그러다가 다시 전화 받은 게 9시50분?
"그 사이에 전화가 없었어요. 그러다 전화가 와서는 '엄마! 우리 배가 사고 났어. 네이버 좀 쳐봐' 하더라구요. 전화기를 든 채로 바로 쳐보니 진짜로 '단원고 침몰중'이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승희야 너 괜찮아?' 하니까 '엄마 걱정 마, 구조하러 온다니까' 하더라구요. '알았어. 잠깐만 끊어봐' 하고는 바로 아빠한테 간 거예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남편에게 달려가 황급히 소식을 전했다. 남편이 곧바로 전화를 거니 계속 통화중. 나중에 통화기록을 확인해 보니, 승희는 그 시간 핸드폰을 잃어버린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 그 친구의 부모님들과 통화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럼 어머니가 승희 목소리를 들은 건 그게 마지막…?
"(입술 바르르 떨며) 저는 그게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인사도 안부도 못 전한 거지. 사람이 진짜….(눈물)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라도 하든가, 친구들하고 잘하고 있어, 뭐 이런 말이라도 하든가. 그런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끊었다는 게…."
9시57분에야 아빠는 승희와 통화할 수 있었다. "배가 기울어져 있다"고 해서 "빨리 나와라" 하니 "아빠 걱정하지 마…" 하다가 전화가 끊겼다.
그 뒤 대화는 카톡으로 이어졌다.
승희: 아빠 걱정하지 마. 구명조끼 메고 난간 잡고 애들 다 뭉쳐 있으니까 배 안이야. 아직 복도.(10:01)
아빠: 승희야 밖에 난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안에는 위험해.(10:02)
승희: 안 돼. 너무 심하게 기울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 더 위험해 움직이면.(10:04)
아빠: 구조중인 거 알지만 가능하면 밖으로 나와서.(10:05)
승희: 아니 아빠 지금 걸어갈 수가 없어. 복도에 애들 다 있어서. 그리고 너무 기울어져서.(10:06)
아빠: 가능하면 빨리 구조돼야 해. 가라앉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내려간다구.(10:07)
승희: 구조될 거야 꼭. 지금은 한명 움직이면 다 움직여서 절대 안 돼.(10:09)
그걸로 끝이었다. 10시17분, 배는 108.1도로 완전히 뒤집혔고 10시21분, 세월호는 선수만 남긴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엄마아빠는 애타게 승희를 다시 불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아빠: 전원 구조되었다는데 승희야 답장 좀 제발.(11:12)
아빠: 승희야 답장 좀 줘 꼭.(23:39)
나중에 복원된 승희의 핸드폰에는 아빠와 통화하기 전인 9시37분에 찍은 동영상이 남아 있다. 구명조끼를 입고 복도 난간에 기댄 채 말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승희의 커다란 검은 눈. 잠시 핸드폰이 흔들리며 승희의 나직한 음성이 녹음되었다. "엄마, 보고 싶어."
"승희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났어요"
전민주씨는 인터뷰 내내 "시신"이나 "발견"과 같은 표현을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승희는 4월22일 "올라왔다".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핸드폰과 안약, 립밤과 함께. 같은 반 아이 중 8명이 살고 27명이 희생되었다.
-마지막 모습이 자꾸 떠올라 힘들다고 하셨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승희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승희 손을 한번 만져봤어요. 차갑기만 하지 평소 때 손 그대로더라고. 근데 진짜 바다 냄새가 많이 났어요. 소독 냄새하고. 우리 승희만 그런 게 아니고 그 옆에 애들이 두 줄로 나란히 열 몇 명 누워 있어서 그랬는가, 아이들이 다 자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냥 '빨리 데리고 가서 빨리 따뜻하게 보내줘야겠다'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애들이 그러고 누워 있는 게 너무 불쌍해가지고."
-그 뒤에 아이를 찾은 부모들은 못 볼 걸 더 많이 보셨겠어요.
"정말 심하게 훼손된 애들도 많아요. 그런 부모들은 저희보다 두배로 울면서 얘기해요. 그 모습을 그대로 찍어둔 부모들도 있고, 아예 얼굴도 못 보고 장례 치른 부모도 있고. 저희 반 애엄마 하나는, 아이가 손톱 열개가 다 새까매져가지고 나왔대요. 염(殮) 같은 거 해본 분한테 물으니, 그게 살려고 발버둥치고 벽을 긁어서 그런 거라고 하더래요."
전원 구조 소식에 환호했다가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진도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을 때까지도 엄마들은 비교적 차분했다. 버스 안에서 선생님이 불러주는 생존자 명단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딘가 있겠지' 믿었다. 진도체육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상황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구조자 명단은 엉터리였고 발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과 음모, 무능과 무성의가 상상을 초월했다.
며칠 후 시신이 올라올 때까지도 안치소 천막 하나 없어 땅바닥에 되는대로 애들을 내려놓는 지경이었다.
-17일날 대통령이 내려올 때는 어땠어요?
"기대가 컸죠. '제발 우리 애 좀 살려달라'고 절규를 했는데, 유가족의 반은 경호원들이 둘러싸서 대통령 얼굴도 못 보고…. 그래도 그 이후엔 뭔가 빨리빨리 진행될 줄 알았어. 근데 맨날 기다리라 그러면서, 에어포켓에 애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하고, 유언비어만 난무하고. 거기 사복경찰들이 엄청 깔렸어요. 유가족인 척해가지고 와서 이간질이나 하고, 그래서 우리가 유가족 명찰을 차게 된 거예요."
-부모들이 무슨 시국사범도 아닌데 왜 사복경찰들이?
"그러니까 뭐가 있는 거지. 배가 가라앉았으면 온통 동원을 해서라도 애들 찾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왜 안 들어가냐 말이야? 뉴스를 보면 군함이 몇 척 투입되고 잠수부가 몇 백 명 투입되고 어쩌고 하는데. 17일날 배 타고 사고 현장엘 가봤어요. 배꼬리만 겨우 보이는데 아무것도 진행되는 건 없고. 초창기에는 애들(시신)만 찾아오면 다 끝날 줄 알았지. 근데 온통 의문투성이인 거예요. 분명히 살 수 있었던 애들을 순식간에 이별도 못 하고 보냈는데 우리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끝내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작년에 그 끔찍한 참사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했는데, 아직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자
식 잃은 엄마아빠들이 물대포 맞으면서 광장을 지키고 있는데도, 세상 관심은 예전만 못하지요. 벌써 잊어버린 사람들, 밉지 않으세요?
"미워요.(씁쓸한 미소) 한편으론 이해도 돼요. 내 일이 아니니까. 저희들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그랬거든요. 뉴스에서 무슨 사고가 나고 애들이 죽었다고 하면, '저 부모들은 어떻게 살까' 걱정을 하다가 잊어버리긴 해도 비판은 하지 않았어요. 작년 인천 아시안게임 기간에 박근혜 대통령이 인천에 왔을 때 우리도 특별법 서명 받으러 거기 가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팔 걷고 삿대질을 하면서 쫓아오는 거예요. '돈을 그만큼 줬으면 됐지, 뭘 얼마나 더 달라고 이 난리냐?'고. 옆에 있던 엄마는 너무 기막혀 대꾸도 못하고 울었어요. 우리 쪽 한 분이 할머니를 모셔가서 한 10분쯤 얘기를 해드리니 그제사 '그런 거였냐?' 하시곤 가셨는데, 이 많은 국민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할까요? 자꾸 우리를 돈하고 연관 지어서 보시는 분들 만나면, 솔직히 우릴 '질투하나?' 하는 생각밖에는 안 들어요. 애들 죽은 거 다 잊고 돈 많이 받을까봐 그러나요? (오열하며) 근데 정말 억만금을 줘도 안 바꿔요. 절대로! 우리 집, 김치 놓고 밥만 먹어도 그동안 행복했어요. 내 새끼 평생 같이 살아야 행복이지, 돈이 무슨 소용 있어요? 우리 애들도 돈에 눈먼 사람들 때문에 저렇게 된 거지만, 아직 어린애들도 많잖아요. 내 새끼만 위험한 데 안 보내면 되지 하는데, 그게 되냐구요? 세상이 온통 지뢰밭인데…. 다시는 애들한테 이런 일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그러는 건데, 왜들 그러시는지 정말 화가 나요."
지금까지 유족들에게 여행자보험 외에 지급된 정부지원금은 재난지역 긴급자금으로 4인 가족 한가구에 108만원씩 6개월치. 그리고 해양수산부에서 230만원씩 위로금 두번 준 것이 전부다. 국민성금으로 모였다는 1200억원 가운데 유족들에게 전해진 것은 한푼도 없고 세월호 유족들이 그걸 요청한 바도 없다. 사단법인 '416가족협의회'를 만든 유족들은 매달 6만원의 회비를 내며 자체적으로 활동비를 조달하고 있다.
아직 아이 못 찾은 윗집 은화 엄마
용기 내서 만나 "미안하다" 했더니
"그런 말 말라, 뭐가 미안하냐" 해
이런 말 주고받는 현실 참으로 비참
9명 실종자 인양 가장 간절히 바라
"놀러 갔다 죽은 애들"과
"나라 위해 죽은 천안함 용사"로
죽음의 등급 나누는 미친 세상
승희는 사고 한달 전 이를 예견하듯
'항해'라는 천안함 추모 시를 썼다
"놀러 가다 죽었다"는 말이 가슴에 못으로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6월부터 배보상 신청을 받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진상규명이 먼저지요. 지금 특조위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밝혀진 게 없는데."
-그럼 신청할 생각이 없으세요?
"네. 진상조사나 책임규명이 제대로 안 되면 다 소용없는 일이잖아요."
-지금 제일 간절히 소망하는 게 뭡니까? '이것만은 꼭 해달라'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 것?
"인양이요. 9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는데, 나도 자식을 잃었지만 아직도 승희가 바다에 있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우리 집 위층에 사는 (조)은화 엄마도 아직 애를 못 찾았어요. 제가 한번 용기 내서 만났어요. 내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은화 엄마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뭐가 미안하냐?'고 하는데, 이런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비참해요. 배가 빨리 인양돼서 9명도 찾고, 도대체 배가 왜 침몰했는지 그 원인도 밝히면 좋겠어요. 그게 해결되어야 우리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슬픈 건 평생 내 몫이니까 내가 지고 가더라도, 죽어서 먼저 간 애들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 아녜요? 모든 엄마들 소망은 그렇게 애들 만나는 거니까."
-지금까지 제일 가슴에 못 박히는 얘기가 뭐였어요?
"애들이 '놀러 가다 죽었다'는 얘기요. 나라를 지키다 죽은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구…."
서러움이 복받쳐서 승희 엄마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자식은 누구에게나 금쪽같은데, 미친 세상은 "놀러가다 죽은 애들"과 "나라 위해 죽은 천안함 용사들"로 생명을 가르고 그 죽음에 정치적 등급을 매긴다. 이 모든 일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승희는 사고 한달 전, '항해'란 제목의 시를 썼다.
억울하게 떠난 어린 넋들의 눈물이 잔잔한 바다 위를 떠돌며 우리 둔탁해진 가슴을 콕, 콕 찌르고 있다.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