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미 문화원 점거’ 동지들이 30년 만에 절에 간 까닭은..
사회

‘미 문화원 점거’ 동지들이 30년 만에 절에 간 까닭은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5/05/25 20:45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으로 인연을 맺은 중현 스님(왼쪽 넷째)과 신정훈 의원(왼쪽 셋째) 등 옛 동지 8명이 23일 오후 전남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용암사에서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85년 함께 농성했던 학생들
전남 화순 용암사 찾아가
‘잊혀졌던 동지’ 중현 스님 만나
“개인적 고뇌 때문에 출가…
세월호 뒤 초심 다시 갖기로”
“아이고, 스님….”

 

부처님 오신 날을 이틀 앞뒀지만, 절은 고즈넉했다. 23일 오후 6시10분 전남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용암사(조계종)에서 중현 스님은 절 입구에서 옛 동지들을 잔잔한 미소로 맞았다. 50대 남성들은 처음엔 어색한 듯, 불교식으로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여 스님과 인사를 나눴다. 중현 스님과 이들은 1985년 5월23일 서울 중구 을지로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다. 서울지역 5개 대학의 학생 73명은 72시간 동안 미문화원에서 농성하며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사과를 요구해 국내외의 큰 주목을 끌었다. 농성자 중 19명이 구속됐다.

 

30년 만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신정훈(51·당시 고려대 신문방송학 4) 새정치민주연합(화순·나주) 의원의 부인 주향득(53)씨는 전날 용암사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중현 스님은 “신 의원과 인연이 있다”고 말했다. 미문화원 점거 당시 중현 스님(속명 오태헌)은 고려대 행정학과 3학년이었다. 때마침 신 의원 등은 23일 광주에서 미문화원 점거농성 30주년 기념 모임을 하기로 했다. 이들은 이날 낮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한 뒤 중현 스님을 찾기로 했다.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던 열혈투사들은 외국계 회사 임원, 의사, 협동조합 운영자, 공정무역, 토목사업가 등 ‘생활인’이 됐다. 여전히 이들은 사회의 주요한 현안에는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30년 전 우리 사회에 던졌던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미국의 문제는 여전히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과는 전략적으로 가까워야 한다고 보지만, 여야 모두 아직도 미국에 대해 너무 저자세인 것 같아요.” 5·18묘지를 둘러보던 홍성영(52·당시 서울대 토목공학 4)씨는 최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한반도 배치를 둘러싼 미국의 압력을 거론했다. 구자춘(52·당시 성균관대 행정학 4)씨는 “80년 5월 광주의 발포 명령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등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사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노골적”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오후 용암사에서 만난 8명의 옛 동지들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특히 오랜만에 만난 중현 스님의 이력을 궁금해했다. “86년 2월, 풀려나던 날 죄수복 입은 채로 차에 태워 역 앞에 툭 떨쳐 놓더라고요.(웃음)” 석방된 중현 스님은 91년까지 노동현장에 있었다.

 

“진보적 이론들이 개인의 고뇌는 해결해주지 못하더라고요.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요. 우연히 출가해 마음 공부를 하며, ‘나한테 필요한 게 이런 거였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1998년 송광사로 출가한 중현 스님은 <송광사>라는 불교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석달 전 용암사 주지로 부임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지켜봤던 중현 스님은 최근 <송광사> 5월호에 쓴 글을 통해 “‘남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젊은 시절 치기 어린 마음을 다시 갖자고 다짐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중년이 된 이들은 이날 옛 동지가 주지로 있는 절의 법당에서 삼배를 드린 뒤 절집을 나섰다. 30년 만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긴 여운이 남았다.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