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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권 칼럼] 달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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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권 칼럼] 달관의 노래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1/30 07:36 수정 2018.01.31 11:21
▲ 김덕권 칼럼니스트

달관의 노래

인생을 달관(達觀)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달관은 인생의 진리를 꿰뚫어 보아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넓고 멀리 바라보거나 또는 그러한 경지를 이릅니다. 그 달관을 《채근담(菜根談)》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달관한 사람은 결국 괴로운 마음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꾼다.’라고요.

「世人以心肯處爲樂 却被樂心引在苦處. 達士以心拂處爲樂 終爲苦心換得樂來.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맞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지라/ 도리어 즐거운 마음에 이끌리어 괴로운 곳에 있게 되고,/ 통달한 선비는 마음에 어긋나는 것으로도 즐거움을 삼는지라/ 마침내 괴로운 마음이 바뀌어 즐거움이 되느니라.」

어떻습니까? 언뜻 보아 달관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부귀공명을 탐하는 것이 인생의 본능이라면, 자기 분수를 지키며 근검절약하고 주어진 본분에 만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인생의 성공이 부귀공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치닫다가 좌절하고 마는 비극이 인생에는 얼마나 많던가요?

그 반면에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며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도리어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쪽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인가 하는 것이《채근담》의 저자 홍자성의 지적인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도 모른 체 지나가게 될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는 가까웠던 친구가 전화 한통 없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면, 한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람과도 웃으며 다시 만나듯이, 지나놓고 보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않으며, 저 좋아 다가오는 사람 말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인생을 달관의 경지까지 이르게 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우리네 인생, 달관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마 비웃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달관의 경지는 어떻게 이르는가요? 18세기의 문인 유언호(兪彦鎬 : 1730~1796)는 조선 후기의 문신입니다.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아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바삐 말을 치달려 가다가, 우연히 시골 마을에서 달관의 마음을 얻습니다. 낙숫물이 뿌옇게 떨어지는 너머 어떤 아낙이 아이의 머리를 긁으면서 이를 잡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보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달관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마찬 가지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은 잘 알면서도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은 잘 알지 못하지요. 달관은 이와 같이 마음으로 헤아려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아이나 이를 잡는 아낙이 행복해 하는 것은 눈으로 보아서 알면서도, 자신이 세사(世事)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그처럼 자유롭게 살 줄 모르는 것은 달관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언호는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고통을 겪은 바 있습니다.《장자(莊子)》를 읽어 유배의 괴로움에서 달관의 경지로 초탈(超脫)하려 들었습니다. 득실(得失)과 사생(死生)이 한가지라는《장자》의 말에 위안을 삼은 것이지요. 유언호는 빈천한 후에야 부귀함이 즐겁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772년 청명당(淸明黨)으로 지목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어 서민이 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승승장구하여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지요. 그후 1779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지만 부모 봉양을 핑계로 대고 사직하였습니다. 이 무렵부터《임거사결(林居四訣)》을 지을 마음을 먹었습니다.

<임거사결>에서 유언호는 전원생활의 네 가지 비결에 일일이 찬송의 뜻을 붙였습니다.
첫째, 달(達)입니다.

세상에서 이 육신이란 꿈과 환각, 거품과 그림자라,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것이 ‘달’이라네. 무엇이 있는 것이고, 무엇이 없는 것인가? 무엇이 기쁜 것이고 무엇이 슬픈 것인가? 그저 인연을 따를 뿐, 마음에 누가 되지 않고 즐겁게 편안하여 어디를 가든 얻지 못함이 없다네.

둘째, 지(止)입니다.

물고기는 연못에 머물러 살고 새는 숲에 머물러 사는 법. 사물은 제각기 사는 곳이 있건만 사람은 그러지 못하지. 통쾌한 데에 머물려면 성해지기 전에 쉬어야지. 그런 다음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니, 진리는 여기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이라네. 제 몸을 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간괘(艮卦)의 상(象)이라네.

셋째, 일(逸)입니다.

육신이 있는 자는 누군들 편안하고 싶지 않겠는가? 육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피로함을 편안함으로 여기는 법. 저 조롱의 새를 보라. 끈에 묶여도 편안하다가 하루아침에 벗어나게 되면 구만리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 예전 괴롭던 일을 추억하고 지금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네.

넷째, 적(適)입니다.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것이 있고, 환상 가운데 실상이 있는 법이라. 사물이 다가와 나와 접촉하게 되면 기뻐할 만하다네. 강과 산과 꽃과 바위, 물고기와 새와 거문고와 책 등이 이리저리 벌려져 있는데, 내가 그 사이에 있어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려 사물과 나를 모두 잊어버린다네.

이 정도가 되어야 가히 달관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달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내 분수(分受)에 만족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요? 우리 남은여생 자타를 초월하는 이 달관의 노래를 즐겁게 불러 보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2년 1월 3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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