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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폐지 줍는 노인' 등친 사기범, 어버이날 선..
사회

[취재후] '폐지 줍는 노인' 등친 사기범, 어버이날 선물까지 챙겨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5/06/04 07:23
■ 아직도 '겨울'을 사는 할머니, 하루 벌이 '삼천 원'

취재를 위해 경찰서로 가는 길, 좁은 골목길 음식점 앞입니다. 종이 더미 속에서 할머니 한 분이 분주합니다. 종이와 플라스틱을 골라내는 일입니다. "힘 안 드세요?" 이것저것 물어대는 저에게 "왜 안 힘들어!" 퉁명스럽지만, 정감있는 답을 내주십니다.

온종일, 거리 거리를 헤매면 폐지 5kg 정도를 모을 수 있답니다. 그 정도면 3천 원 정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아직 절반밖에 못 했다며 윗동네로 가신답니다. "쉬엄쉬엄하세요."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할머니의 옷이 눈에 들어옵니다. 잔뜩 보풀이 난 회색 '솜옷'이었습니다. 한낮 햇살이 더욱 뜨거워진 6월입니다.



■ 사기범이 내먹은 건 '벼룩의 간'

경찰서에서, 사기를 벌인 피의자를 만났습니다. 막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50대 남성입니다. 피해액은 천만 원이 조금 넘습니다. 굳이 수억, 수백억 비리 사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루 몇 건씩 접수되는 대형 사기 사건과 비교하자면 '보잘것없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사기를 친 상대가 폐지를 줍는 노인 56명입니다.

'학교 행정실장' 행세를 했습니다. 폐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이 대상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나온 책과 신문을 주겠다고 속였습니다. 폐지 양이 많아 사람을 불러 옮겨야 하니 수고비가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할머니들은 속 치마에 꼭꼭 숨겨뒀던 꼬깃한 쌈짓돈을 내줬습니다.

범행은 치밀했습니다. 당장 내줄 돈이 없는 어르신들에게는 함께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폐지 줍는 어르신 대부분이 홀로 사는 기초생활대상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행 대신, 서랍이나 냉장고 속에 연금이나 보조금을 넣어둔다는 걸 이 가짜 행정실장님은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기는 지난 2011년부터 지난달까지 계속됐습니다.

■ 할머니가 내어 준 건 '사람 사는 情'

경찰서 밖,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사기범이 잡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을 겁니다. 76살의 할머니는 15만 원에 7만 원, 모두 22만 원을 뜯겼습니다.

지난달, 가짜 행정실장님은 이 할머니에게도 똑같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순순히 15만 원을 내줬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집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교장 점심값 10만 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할머니는 함께 집으로 가 7만 원을 줬습니다. 10만 원을 채우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했습니다. 가짜 행정실장이 가져간 7만 원은 어버이날 딸이 보내준 용돈이었습니다.

"할머니, 폐지만 받으면 되지 왜 돈을 줬어요?" "어려운 나를 도와준다고 하니까 고마워서..." 할머니가 내 준 22만 원은 폐지를 받는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세상, 그저 사람 살아가는 '정'이고 '고마움'이었습니다.

■ 사기범이 가져간 '10만 원'의 의미

가짜 행정실장님께 물었습니다. "어렵게 사시는 어르신들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휴...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70대 노인들이었고, 귀가 어두운 80, 90대 어르신도 2명이나 있었습니다. 어르신 한 분 당 적게는 10만 원, 많게는 25만 원을 떼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사기를 당하고도 대부분 신고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자신이 모자라서...', '언젠가는 (폐지를) 주겠지….'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만 56명인데, 가짜 행정실장이 자백한 범행은 80건이랍니다. 어딘가에서 폐지를 줍고 계실 피해 어르신들이 더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짜 행정실장님은 이 돈을 자신의 생활비로, 또 손주들 용돈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10만 원, 꼬박 한 달을 쉬지 않고 폐지를 모아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입니다. 가짜 행정실장님은 이 '10만 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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