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의 성공과 얄타 회담
1945년 2월 초, 소련군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프랑크푸르트안데오데르까지 진출했다. 서쪽에서 진군해오던 미영 연합군은 라인강도 건너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소련군이 독일 전역을 해방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944년 11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유럽 대륙 전체가 소련 세력권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영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독일 처리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1943년 이탈리아, 1944년 프랑스 해방에서 드러났듯이, 그리고 스탈린이 지적했듯이 먼저 "영토를 장악한 세력이 자신이 원하는 사회체제를 도입"할 수 있으며 "누구든 자신의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을 향한 경쟁에서 소련에 한참 뒤처진 미국과 영국은 전후 처리 문제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미영의 대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협상을 통해 전후 독일 문제를 미국, 영국, 소련이 공동으로 처리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얄타 협약). 다른 하나는 미영의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탈린이 일방적 독주를 하지 못하도록 경고장을 보내는 것이었다(드레스덴 공습). 1945년이 되면서 전후 처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미영과 소련의 치열한 암투가 시작된 것이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영군은 독일군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미영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도움 덕택이었다. 6월 22일 소련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 맹공을 가함으로써(바그라티온 작전) 미영의 군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소련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동부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9월경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한다. 이때까지 자국 영토에서 전투를 벌였던 소련은 이후 동유럽을 넘어 독일을 향해 진군한다.
한편 미영은 1944년 9월, 공중과 지상을 통한 라인강 도하(마켓가든 작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거침없이 진군하는 동안 미영은 라인강 서쪽에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게다가 1944년 12월∼1945년 1월에는 독일의 폰 룬데스타트 원수의 아르덴 반격으로 미영군은 위기에 몰린다(영화 <발지 전투>). 1월 말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영은 소련군의 개입으로 간신히 패배를 모면한다. 미군의 긴급 구조 요청에 따라 소련군이 예정보다 1주일 빠른 1월 12일, 폴란드 공세에 나선 때문이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림반도의 휴양지인 얄타에 미국, 영국, 소련 정상이 모인 것은(얄타 회담) 이런 배경에서였다. 소련의 군사적 독주가 정치적 독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3국 공동 합의를 이끌어내자는 것이 미영의 목표였다.
이에 앞서 미국과 영국은 1944년 가을, 런던에서 소련과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상을 벌였다. 미영은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을 미국, 영국, 소련 세 지역으로 분할 지배하자고 제의했다(나중에 프랑스 점령 지역이 추가돼 4개국 분할 점령이 됨). 소련의 독일 독식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영의 우려와 달리 스탈린은 이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게다가 수도 베를린의 분할 지배에도 동의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한마디로 소련은 임박한 군사적 승리로 독일 전체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영과의) 공동 지배를 받아들였다"고 지적한다.
베를린은 소련의 점령 지역이 될 동부 독일에 있기 때문에 소련이 굳이 분할 점령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이후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이른바 '자유의 전초기지'로 이후 동독과 소련의 골칫거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미영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나름대로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미영이 나치 독일과 힘을 합쳐 소련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혁명 직후 혁명을 파괴하기 위한 서방의 무력 개입, 그리고 1930년대 나치에 대한 영불 유화정책의 목표가 소련 멸망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서방에 심어둔 스파이 등을 통해 미영의 속셈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독일과 미영의 합작은 스탈린에게 그야말로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따라서 스탈린은 처칠이나 루스벨트에게 무력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소련의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면, 미영의 웬만한 요구는 다 받아들였다.
다른 하나는 전쟁 배상이었다. 1942년 6월부터 2년 이상 자국 영토에서 피어린 전투를 벌였던 소련은 인구 3000만 명을 잃고 경제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따라서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독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따라서 얄타 회담에 임하는 스탈린의 입장은 소련의 안보와 전후 배상 문제만 보장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 자크 파월은 "전쟁 말까지도 소련의 관심은 생존", 소련이라는 "일국사회주의의 생존"이었으며 "1944년 런던 합의와 이를 추인한 얄타 협약은 (당시) 미영의 군사적 열세, 그리고 소련의 군사적 우세 속에서 독일에 대한 최소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미영의 시도가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얄타 협약에 대한 서방측의 일반적인 평가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른바 '얄타 밀약'이라는 비밀 협정을 통해 노회한 스탈린이 병약한 루스벨트를(4월 12일 사망) 농락해 동유럽과 한반도 등에서 엄청난 양보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방의 평가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 파월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파월에 따르면 우선 얄타 회의를 간절히 원한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회의 장소가 소련 영토인 얄타로 정해진 것도 당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스탈린은 협상이 필요 없었다. 1945년 2월 초의 군사적 상황에서는 소련이 독일 전체를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협상 결과도 미영에 유리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는 회의가 끝난 후 "소련은 우리가 양보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양보했다"고 말했다. 미국 역사가 캐롤린 우즈 아이젠버그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표단은 소련의 합리적인 선택 덕분으로 미국과 인류가 "처음으로 평화의 위대한 승리를 얻었다"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전했다.
얄타 회담은 독일 문제와 관련해 1944년 런던 협정의 내용을 추인한 것이었다. 이는 미영에 매우 유리했는데, 더 넓고 경제적으로 더 발전된 독일의 서쪽 지역(동독의 약 3배)을 미영이 갖게 됐기 때문이다.
얄타 회담에서는 전후 배상 문제도 합의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독일의 배상 금액을 대략 200억 달러로 산정하고 그중 절반을 소련 몫으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200억 달러라는 금액은 많은 건가? 독일 역사가 빌프리트 로스는 실제로는 "매우 약소한 금액"이라고 말한다. 1947년 추산에 따르면 소련의 전쟁 피해 금액은 1280억 달러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전후 미영과 소련이 독일 처리 문제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소련이 실제로 동독과 서독에서 받아낸 배상금은 고작 61억 달러에 불과했다.
스탈린에게 전후 배상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분할 점령에 동의한 것도 전후 배상 문제에서 미영의 협력을 기대한 때문이었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대일 전쟁에 참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당시 헨리 모겐소 미국 재무장관은 독일의 '유목국가화'를 주장했다. 독일의 모든 산업 역량을 제거해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기업가나 주요 정책 결정자들의 생각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경제적 재건을 원했다. 전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된 독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독일과 무슨 교역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또한 독일의 유목국가화에 따른 가난과 혼란은 공산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아가 미국 기업의 독일 내 자회사들의 운명도 걸린 문제였다. 독일이 유목국가가 된다면 독일 자회사들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목국가화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GM의 알프레드 슬로언 회장이었다. 소련으로서도 유목국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독일이 부유해져야 전쟁 배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목국가화 계획은 포기됐고, 모겐소 장관은 1945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교체됐다(7월 15일).
얄타 협약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동유럽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파월에 따르면 동유럽의 공산화는 소련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얄타 회의 당시 소련의 요구는 소련과 폴란드의 기존 국경을 서쪽으로 물려 폴란드 동부의 이른바 '커존(Curzon) 라인'으로 하되, 폴란드-독일 국경을 독일 동부의 오데르 나이제강으로 해 폴란드의 영토 손실을 보전해준다는 것이었다. 커존 라인은 러시아혁명 직후 영국 외무장관 커존 경이 제안한 것으로, 1920년 폴란드는 신생 볼셰비키 정부와의 전쟁을 통해 커존 라인 동쪽까지 영토를 확장한 바 있었다. 스탈린의 요구는 과거 폴란드에게 빼앗겼던 소련의 서쪽 영토를 되찾고 폴란드에게는 독일 영토 일부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1920년 폴란드와의 전쟁, 1941년 폴란드를 통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등 과거의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폴란드 등 동유럽에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는 정권이 수립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스탈린의 요구는 루스벨트나 처칠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파월은 지적한다.
반면 미영은 동유럽에 공산체제가 들어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영 측의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영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얄타 회의에서 미영이 동유럽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소련에 허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파월의 설명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동유럽에는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정부가 들어섰다. 얄타 협약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뭔가? 첫째, 트루먼의 핵 외교 때문이다. 포츠담 회담이 진행되던 1945년 7월, 미국의 첫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트루먼은 소련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취하면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일방적 양보를 요구했다. 둘째, 폴란드 망명정부(런던)의 비현실적 반소 태도 때문이다. 주로 귀족 출신인 이들은 극단적 반소, 반공 태도를 취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던 커존 라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의 태도는 곧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의미했다. 결국 스탈린은 공산 세력(루블린 폴즈)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자신의 안보에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인접 국가에 비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핀란드, 오스트리아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는 미국과 폴란드 망명정부의 고압적이며 경직된 태도가 이를 가로막았다.
저자 파월은 "미영은 소련이 자유선거를 치르지 않고 폴란드에 공산 괴뢰 정권을 세웠다고 비난하지만 그리스, 터키, 중국에 대한 미영의 정책은 어떠했나?"라고 반문한다. 미영은 자신의 세력권인 이들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묻기보다는 무력에 의해 자신의 체제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드레스덴 공습 : 스탈린에 대한 무력시위
얄타 회담 직후인 1945년 2월 13일, 미영의 폭격기 800여 대가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다. 사흘 밤낮 동안 소이탄을 비롯해 75만 발의 폭탄이 투하됐고 이로 인해 20∼2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드레스덴 공습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공격보다 더 잔인한 공격이었다. 역사상 최악의 공습이라는 평가도 있다. 미군 병사로 참전했다 독일군에 잡혀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감금돼 있던 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1922∼2007)는 후에 이 공습을 소재로 <제5도살장>이라는 작품을 써냈다. 한마디로 인간 도살이었다는 얘기다.
영국 언론인 겸 역사학자 필립 나이틀리는 당시 드레스덴 공습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폭탄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인공 폭풍은 갈수록 사나워졌다. 섭씨 1000도가 넘는 폭심 속으로 사람은 물론 모든 것들이 시속 160킬로미터의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화염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사람들은 수천 명씩 태워지고 질식됐다. 다음 날 미국 전투기들이 드레스덴에 나타나, 살기 위해 엘베강둑을 따라 뛰어가는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독일의 플로렌스'로 불리는 문화 도시, 이렇다 할 군수공장도 없고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드레스덴, 게다가 독일의 패망이 사실상 기정사실화된 전쟁 말기에 이토록 잔인한 공습을 퍼부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스탈린에 대한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력시위였다. 미국 역사가 마이클 셰리는 "공격할 만한 군수공장도 거의 없는" 드레스덴에 대한 미영의 과도한 공습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폭격으로 인한 불길은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소련군은 드레스덴에서 100킬로미터 이내에 있었으며, 드레스덴을 지날 예정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밤하늘의 무시무시한 화염을 목격했을 것이다. 또한 미영은 나중에라도 소련군이 폭격의 참상을 현장에서 직접 보길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전쟁 말기 미군이 소련군보다 먼저 드레스덴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처칠은 한사코 이를 만류했다. 독일 땅을 한 치라도 더 점령하기 위해 미영과 소련이 경쟁하는 판국에 왜 처칠은 미군의 드레스덴 입성을 말린 것인가? 소련이 먼저 드레스덴의 참상을 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드레스덴에 입성한 것은 5월 8일이었다.)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라는 점은 드레스덴 공습이 당초 얄타 회담 개최일인 2월 4일로 예정됐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기상 악화로 2월 13일로 연기됐을 뿐이다. 미영은 얄타 회담 개최일에 맞춰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탈린의 양보를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미영은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의 진군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련은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다. 나아가 2차 대전 내내 미영이 소련을 도운 적은 없다. 설사 소련이 협조를 요청했다 해도 미영은 결코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파월은 지적한다.
이어 파월은 "드레스덴 공습은 실수가 아니었다.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공습에 참여했던 캐나다 출신 승무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폭격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당시 소련군은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고 미영은 이런 소련군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하려 했다. '우리 육군도 대단하지만, 공군력은 훨씬 더 막강하거든. 그러니까 까불지 마. 안 그러면 우리 공군이 소련 도시들에 어떤 피해를 줄 수 있을지를 보여주지.' 이것이 처칠과 그 일당들의 목표했다. 계산된 학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독일 공습을 주도했던 아서 해리스는 자서전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에서 드레스덴 공습은 "나보다 훨씬 고위층에서" 결정됐을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전략 폭격의 황제(czar)로 불리는 해리스보다 훨씬 고위층이라면 처칠이 결정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처칠이 드레스덴 폭격을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것보다는 스탈린을 겁주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가 알렉산더 매키는 "처칠은 드레스덴의 밤하늘에 (소련에 대한) 경고장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나치를 작살냄으로써 소련 공산주의자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또한 영국 공군의 한 기록도 이러한 의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드레스덴 공습은 "적(독일)을 타격하는 것 외에 소련군이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때 우리 공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공군 참모차장 데이비드 쉴레터 장군은 얄타 회의 1주일 전(1월 29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공군력은 전쟁이 끝난 후 협상 테이블에서 최고의 카드가 될 것이다. 이번 드레스덴 공습 작전은 우리의 협상력을 말할 수 없이 크게 높여줄 것이다. 또는 러시아로 하여금 자신의 힘이 얼마나 약한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드레스덴 공습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미영의 경고장이었다. 이를 위해 30만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야 했다. 독일의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그리고 동유럽의 수많은 난민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냉전 기간 동안 서방에서는 소련이 2차 대전을 통해 유럽 전체를 정복하려 했으나 미영이 이를 막았다는 얘기가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소련은 나치의 침공에서 그야말로 간신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소련군과 시민들의 초인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 말기까지도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생존이었다. 과연 이런 나라가 유럽 정복을 꿈꿀 수 있었을까?
2차 대전에 의한 소련 희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3000만 명에 이른다. 전쟁 이전 소련 인구의 15퍼센트가 희생됐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이런 상태에서 소련이 또 다른 (정복)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을 공격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스탈린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소련군은, 엄청난 공군력에 핵무기까지 가진 미영의 군사력에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아가 미영과 대결하기보다는 양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영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 낫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미국 자신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실질적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초 미국 합참 보고서는 소련은 "영국 및 미국과의 갈등을 피해야만 할" 엄청나게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에서 1945년에 소련이 전 유럽을 석권하려 했다는 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독일 옵션 : '나치와 함께 소련을 쳐부수자'1945년 2월까지 소련에 유리했던 유럽의 전황에 3월부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미영 연합군의 동진 속도가 갑작스럽게 빨라진 것이다. 3월 7일 미군이 코블렌츠 부근의 레마겐에서 라인강을 넘었고, 3월 23일에는 영국군이 북쪽 베젤에서 라인강을 돌파했다. 종군 특파원 할 보일이 "이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군"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후 미영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거침없이 동쪽으로 진군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저항은 '봄날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역사가 캐롤린 우즈 아이젠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3월 말 현재, 서부전선에서는 30개 사단 미만의 독일 병력이 미영을 대적한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150개 사단 이상의 독일군이 소련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로써 미영 연합군이 소련군보다 영토 점령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할 즈음(4월 12일), 미영과 소련은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같은 거리를 두고 베를린에 다가가고 있었다."
3월 초까지만 해도 소련군이 북유럽의 덴마크까지 해방시켜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으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저항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영국군이 먼저 발틱해를 따라 뤼벡 부근까지 진출했다. 한편 남쪽에서 미군은 체코 프라하까지 진군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신속한 진군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소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적개심을 잘 알고 있던 나치 독일이 미영과의 단독 강화를 추진한 때문이었다. 즉 서부전선의 전쟁을 끝내고 나치와 미영이 힘을 합쳐 소련을 치자는 것이었다. 전쟁 말기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내놓은 이러한 아이디어는 '괴벨스 시나리오', 또는 '독일 옵션'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OSS(전략첩보국, CIA의 전신) 등 미국 정부 일각에서 '독일 옵션'이 추진된다.
독일 역사가 유르겐 브룬은 OSS의 독일 옵션 추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비밀 조직은 미국 기업의 최고경영자, 월스트리트의 금융가와 변호사, 과학자, 군 고위 장성, 정치가, 그리고 이른바 '국방 전문가(defense intellectual)들의 집합체다. 확실히 OSS는 미국의 지배 계층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 OSS는 한편으로 나치즘 격퇴를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소련의 '소멸', 또는 전후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OSS를 이끄는 기업가, (존 포스터 덜레스와 같은) 변호사, 그리고 정치인들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친파시스트, 반공산주의 성향을 분명히 드러냈으며 전쟁 기간 동안에도 "존경할 만한" 독일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히틀러를 제거하고 신망 받는 군인을 지도자로 앉힌 다음, 소련 정벌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제거를 위한 군사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많은 반히틀러 인사가 제거된 탓에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권총 자살한 후 미영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됐다. 후계자로 임명된 되니츠 제독은 열혈 나치 당원이 아니라 비교적 신망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독일판 바돌리오 정부(무솔리니 없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없는 나치 정부의 수립)의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영국 몽고메리 원수는 전쟁 말기, 처칠로부터 소련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전투 역량을 보존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1954년 11월). 실제로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군복과 무기의 소지가 허용됐으며 독일 항복(5월 8일) 후인 5월 13일에는 독일군 장교 포로가 자신의 무기로 탈영하려던 부하 2명을 즉결 처형하기도 했다. 또 히틀러의 후계자로 임명된 되니츠 제독은 취임 라디오 연설에서 향후 독일은 소련군과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되니츠는 자신이 미영 연합군의 독일측 파트너로서 소련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되니츠 제독은 5월 23일 연랍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된다.
또한 미영은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교들에게 소련군과의 전투 경험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러시아 삼림과 늪지대에서 치른 전투', '최북단 극한 지대에서 치른 전투' 등의 보고서가 제출됐다.
패튼을 비롯한 주요한 미군 지도자들도 소련과의 전쟁을 원했다. 패튼 장군은 아이젠하워 최고사령관의 직속 부하인 조셉 맥나니 장군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조만간 소련군과 싸워야 할 것이오. (…)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소? 우리 미군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아 전투에 지친 러시아 놈들을 3개월이면 쫓아버릴 수 있을 텐데. 독일군을 무장시켜 우리 편에 합류시킨다면 소련군 깨부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요. 독일 사람들은 러시아 놈들을 미워하거든. 내게 열흘만 준다면 저것들과의 전쟁의 빌미를 만들어 내겠소. 그것도 소련 놈들 책임인 것처럼. 그렇게 되면 완전히 정당하게 저놈들을 공격할 수 있을 것 아니오."
나치 독일과 합세해 소련을 치겠다는 것은 패튼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미국 역사가 러셀 부하이트와 윌리엄 크리스토퍼 하멜에 따르면 미국의 많은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1945년에 (소련에 대한) 예방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은 미국이 "잘못된 적"과 싸우고 있다고 개탄했다. 태프트 상원의원은 "공산주의의 승리가 파시즘의 승리보다 미국에 훨씬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군사 엘리트를 길러내는 웨스트포인트의 고위 장성들은 "유태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잘못된 적을 골랐다며 "우리는 히틀러가 아니라 빨갱이들과 싸웠어야 했다"고 불평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의 미영군에 대한(즉 소련을 배제한) 개별 항복 협상이 비밀리에 벌어졌다. 1945년 3월, 중립국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OSS 요원 알렌 덜레스와 나치 친위대(SS)의 악명 높은 칼 볼프 장군 간에 협상이 있었다. 볼프는 동부전선에서 소련인 30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1급 전범이었다.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 협상(작전명 Operation Sunrise)에서 양측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1943년 여름 무솔리니가 패망한 후 미영군에) 저항 중인 독일군의 항복을 논의했다. 미국은 두 가지 이득을 노렸는데, 하나는 항복한 독일군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공산주의 빨치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북동쪽 유고슬라비아에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로 세력을 넓혀오던 티토 휘하의 공산 빨치산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베른 협상을 알아챈 소련은 협상 참여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미영과 소련은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이래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는 합의 위반이었다. 스탈린은 거칠게 항의했고, 소련과의 갈등을 우려한 루스벨트는 조용히 협상을 접었다.
1945년 5월 초부터 미군은 독일군의 개별 항복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당시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던 수십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군이 아닌) 미군에게 항복했다. 이는 당시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독일군의 절반에 해당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힘을 합쳐 소련을 치겠다는 미국 정치, 경제, 군사 엘리트들의 계획은 일반 미국인, 특히 전투에 참가한 미군들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1945년 3월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55퍼센트가 전쟁 이후에도 소련과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도 소련군에 대한 우호와 존경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 독일군을 격퇴한 진짜 주역은 소련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소련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희생과 고난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들을 좋아했다. 만일 우리가 소련군을 만나게 된다면 서슴없이 그들에게 키스하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우리 병사들 사이에서 단 한마디라도 소련에 대한 험담을 들은 적이 없다. 만일 우리가 소련군과 싸운다면 우리가 질 것이다. 그게 현실적 판단이다. 전쟁 말기 나는 패튼 휘하에 있었는데, 패튼은 우리가 모스크바까지 진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소련군은 우리를 박살낼 것이었다. (…) 나는 우리 미군이 소련군과 맞서 싸울 만큼 깡다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상에 대해서 알 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핵 외교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트루먼 부통령이 그 뒤를 잇는다. 루스벨트는 소련에 대해 협상과 강압, 즉 당근과 채찍을 병행한 반면 트루먼은 강압 외교로 일관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지도자의 개인적 성향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1945년 봄 이후 전쟁을 둘러싼 상황이 미국에 크게 유리하게 바뀐 때문이었다.
우선 3월 이후 독일 점령을 위한 미군의 진군 속도가 소련을 크게 앞질렀다. 앞에 말한 대로 나치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미군에 대한 저항을 사실상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7월 16일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루스벨트가 소련에 유화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첫째 1945년 2월까지 소련군의 독일 진군이 미국보다 훨씬 앞섰기 때문이었고, 둘째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소련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단독으로 수행한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유럽 전장에서보다 훨씬 많은 인명 손실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는 소련의 요구를 일정하게 들어주는 유화적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사후 상황은 급변한다. 독일 점령을 위한 소련과의 경쟁에서 미군이 갑자기 앞서게 됐고 7월에는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더 이상 소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트루먼의 소련에 대한 강압 외교의 배경이 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4월 25일 원폭 개발 비밀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최초 보고를 받는다. 미국 역사학자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에 따르면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원폭에 대해 "만능의 환상(Fantasy of Omnipotence)"을 품었다고 한다. 즉 핵폭탄만 있으면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를 소련에 강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전후 처리를 위한 포츠담 회담(7월 17일∼8월 2일)이 독일 패망(5월 8일) 후 두 달 이상이 지난 다음에야 열린 데는 미국이 원폭 개발의 성공을 기다린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이 열린 직후 트루먼은 원폭 실험의 성공 소식을 듣는다. 이제 미국은 소련에 어떤 양보도 할 필요가 없다고 트루먼은 생각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개발 소식을 알리면서 소련의 일방적 양보를 요구했다. 트루먼의 핵 외교(공갈)는 독일 및 동유럽에서 소련의 일방적 철수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파월은 "트루먼의 핵 외교로 미국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핀란드의 사례는 스탈린과의 협상이 불가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핀란드의 경우, 협상을 통해 핀란드가 소련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대가로 자본주의 체제 및 비공산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반면 핵무기를 앞세워 소련의 일방적 철수를 요구했던 동유럽에서는 미국의 목표가 달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월은 "트루먼의 핵 외교가 없었다면 유럽의 분단(철의 장막)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의 강압 외교가 동유럽의 공산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전후 독일의 운명 : 분단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전후 독일을 점령한 미국(그리고 영국 및 프랑스)과 소련의 정책 목표는 서로 달랐다. 소련은 독일이 통일되고 민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또한 통일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확보하고,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스탈린은 이것이 소련에 가장 유리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소련이 전후 내내 독일의 분단을 반대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단일한 독일',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 확보', '소련에 대한 독일의 안보 위협 제거'를 원했다. 스탈린은 세계를 대상으로 한 공산혁명(스탈린의 정적이었으며 그에 의해 암살된 트로츠키의 노선)보다는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서방 지도자들에게 "독일에게 공산주의란 암퇘지에게 안장을 올리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반면 미국의 정책은 경제적 요소에 의해 결정됐다. 즉 1차 대전 이후 갈가리 찢긴 세계 경제를 미국 주도 하의 자본주의 질서 아래 통합하는 것이었다. 또한 과잉 생산에 의한 미국의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해 막대한 미국 생산품을 소비할 해외 시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소련에 대해 전쟁 배상을 한다는 것은 독일 내 미국 기업의 이윤이 소련 공산주의 건설에 이용됨을 의미한다. 독일의 전쟁 배상은 독일 내 미국 투자가들에게는 손해였던 것이다. 파월은 "트루먼 등 미국의 지도자들은 (나치 격퇴에 가장 많은 희생을 했던) 소련의 정당한 요구보다는 미국 기업들의 요구에 훨씬 더 민감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독일 분단에 이르는 모든 주요한 과정의 결정은 워싱턴이 주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통일 독일보다는 분단된 독일이 미국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통일 독일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 또는 독립적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미국은 소련의 경제적 재건을 원치 않았다. 즉 독일의 대소련 전쟁 배상을 최대한 막으려 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경제적으로 앞선 독일의 서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의 점령 지역은 독일 영토의 4분의 3에 이르렀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과 함께 단일한 독일을 건설하는 것보다는 경제적으로 앞선 서부 독일을 자신의 확실한 지배 아래 두는 것을 원했다.
1946년 5월 서독의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무기한 유보한 미국 군정장관 클레이 장군의 결정은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얄타 회담 때 미국, 영국, 소련 3국 정상들이 합의한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마저 거부한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소련 경제의 재건을 방해한 것이다.
얄타 회담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은 소련의 전쟁 피해를 200억 달러로 산정하고 그중 절반인 100억 달러를 독일로부터 받아낸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의 실제 전쟁 피해는 무려 1280억 달러였다. 얄타 회담 당시 미국 국무부는 전후 독일은 소련에 매년 65억 달러씩 전쟁 배상금을 갚아야 할 것으로 추산했다. 또한 한 연구에 따르면 1945년의 소련 경제는 1941년 대비 20퍼센트 축소됐고, GNP 25년치에 해당되는 전쟁 피해를 봤다(영국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
그러나 소련이 실제로 동서독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51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것도 서독에서는 고작 6억 달러, 동독으로부터는 45억 달러를 받아냈을 뿐이었다. 인구나 영토 규모에서 서독이 동독의 3배나 되는 데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앞서 있었다는 점에서 전쟁 배상의 부담을 사실상 동독 홀로 짊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의 고의적 방해에 의해 전쟁 배상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소련은 자력으로 경제 재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배상 부담의 대부분을 거의 홀로 감당해야 했던 동독도 커다란 경제적 곤경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은 이른바 '지적 도둑질(intellectual plunder)'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자신의 점령 지역에서 열혈 나치 당원이자 V-2 등 로켓 기술자였던 베르너 폰 브라운 등 우수한 독일 과학기술자들을 발굴해 미국으로 보내는 한편 독일 기업들의 온갖 특허 기술들을 빼돌림으로써 전후 미국의 눈부신 기술 및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브라운은 이후 미국 우주 개발의 아버지가 된다.
파월은 "독일의 분단은, 전쟁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긴 반면 전후 평화 정착으로 큰 위협을 받게 된 미국 자본주의를 살찌우고 새로운 활력을 준 반면,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고 평화 분담금을 기대했던 소련은 빈털터리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독일의 분단은 군사적으로도 미국에 유리했다. 1954년 아데나워 총리가 재무장한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킴으로써 서독을 서방 패권 하의 반소 진영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완료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서독을 미국 주도 하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아래 편입시키는 한편 대소 군사기지로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은 1953년까지 동독을 해체하고 단일한 중립국가 독일의 건설을 끈질기게 제안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의 분단으로 말미암아 소련은 안보 확보와 경제 재건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박탈당한 것이다.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를 기해 전투가 종료됐고, 1919년 6월 28일 체결된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의해 법적으로 마무리됐다. 2차 대전 가운데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전쟁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소련과 중공은 불참)에 의해 법적 마무리가 지어졌다. 또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와도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대나치 전쟁을 마무리 짓는 평화조약은 전후 45년이 지난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2+4(동서독+미영불소) 회담에서 체결됐다. 그동안 승전국 간에 독일의 운명에 대해 합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년 후 소련은 해체된다. 이는 소련의 멸망이야말로 미국이 2차 대전을 통해 이루려 했던 궁극적 전쟁 목표였음을 말해준다.
1945년 이후 : 좋은 전쟁에서 영구 전쟁으로파월은 "냉전은, 미국 지도자들이 핵무기로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때에 시작됐다"고 말한다. 즉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핵 공갈을 가한 때에 사실상 냉전은 시작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1945년 8월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 공격은 사실상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였으며 이로써 미소 간의 군사·정치적 대결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 인류 최초의 핵 공격을 단행한다.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당초 예상보다 일찍 종식됐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미국 정부가 작성한 '미국 전략 폭격 조사' 보고서는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소련의 참전이 없었어도, 그리고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 분명"했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이로 미루어 미국의 핵 공격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것보다는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한다.
사실 미국에게 전후 소련과의 동맹보다는 소련과의 적대가 훨씬 더 유리했다. 첫째, 좌파 등 미국 내부의 적을 없애는 데, 둘째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정당화하는 데 유용한 빌미가 됐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로버트 그리피스에 따르면, 전후 미국에서 복지국가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파워엘리트가 사회 개혁의 압력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빌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소련과의) 냉전이었다.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들은 자유기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경제 체제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경향'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파월은 "전쟁 기간 소련은 동맹으로서 미국에 유용했고, 전후에는 적으로서 유용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미국은 새로운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 파워엘리트의 입장에서 냉전은 완벽하게 좋은 것이었다. 첫째, 완벽한 적과 싸우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웨스트포인트의 장군들이 말했듯이 2차 대전은 "잘못된 적과의 싸움"이었고 "미국은 빨갱이들과 싸워야 했다." 2차 대전은 미국 파워엘리트가 원했던 것도, 주도했던 것도 아니었다. "반면 냉전은 미국 제도권이 매우 원했던 것이며 주도한" 전쟁이었다.
둘째,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정당화함으로써 전시의 경기 호황을 이어나갈 수 있게 했다. 또한 냉전은 사실상 소련의 전후 복구에 대한 방해 공작(사보타지)이기도 했다. 미국은 소련을 미국과의 끝없는 군비 경쟁에 끌어들임으로써 미국 경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던 소련 경제를 파멸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냉전은 소련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의적 군비경쟁"이라는 독일 작가 위르겐 브룬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실험은 시작부터 끝까지 대규모 군사 개입 등 서방 외부세력의 조직적 방해에 시달렸다. 외부 개입의 궁극적 목적은 소련의 완전한 파괴였다. 그리고 결국 소련은 미국과의 끝없는 군비 경쟁 끝에 스스로 무너졌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의 평화공존은 불가능했을까? 실제로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닉슨 등은 소련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했으나 국내 강경파의 반대와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파월은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현재의 미중 관계를 보면 미소의 평화공존도 결코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윌슨 대통령은 1차 대전에 대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윌슨의 이 같은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2차 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이 이어졌고, 민주주의는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파월은 냉전에 대해 "자본주의의 모든 대안을 끝장내기 위한 전쟁", "자본주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파월은 이어 냉전의 승리자는 미국이 아니라 펜타곤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펜타곤 시스템'이란 가상의 외적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끝없는 군비 확장을 통해 일부 전쟁 세력이 이득을 보고 대다수 국민이 피해를 보는 체제를 말한다. 있지도 않을 전쟁을 위해 "대중이 돈을 내고 극소수가 이익을 보는" 체제이다. 2차 대전에 이어 냉전이 계속되면서 미국에서는 펜타곤 시스템이 사회를 장악하게 된다. 흔히 2차 대전을 민주주의의 승리로 얘기하지만 이후 세계사의 흐름은 여전히 '(가상의) 전쟁 공포'가 사회를 억누르고 있다. 소수의 전쟁 세력이 다수의 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저명한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지난 1월 초 보스턴에서 열린 '평화와 안전을 위한 경제학자들' 모임의 올해 주제는 '제2차 냉전의 예방'이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기조연설에서 "절박한 의료, 교육, 복지 서비스를 고갈시키면서 '상상된 위험들'을 경계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를 쏟아 붓는 일의 사악함"을 질타했다. 그가 염두에 둔 주된 상상된 위험은 러시아 팽창주의였다.
스키델스키에 따르면, 냉전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조지 캐넌은 죽음을 몇 년 앞두고는 냉전이 지속된 이유가 서방이 '무조건 항복'에 버금가는 것을 얻을 때까지 소련과의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묻는다. 1952년과 1954년 소련이 독일의 중립을 전제로 독일 통일을 용인했고, 1954년에는 모든 체제에 열린 보편적 유럽집단안보조약을 제안했으며, 1955년에는 흐루쇼프가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 몇 명인가?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조약이 체결된 1955년은, 나토 창립 6년 후 이 모든 제안들이 거절된 직후였다.
스키델스키는 또 질문한다. 고르바초프가 나토를 독일 밖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찬성했고, 나토와 바르샤바조약을 대체할 새로운 대서양-유럽 집단안보체제를 제안했다는 사실, 그리고 2001년 푸틴이 러시아의 나토 가입을 원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고려대 고세훈 교수, <다산포럼> 741호 2015년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