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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 애국, 여기 깃들다..
사회

현충일 , 애국, 여기 깃들다

심종완 기자 입력 2015/06/05 16:58
현충일
▲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부정장이었던 이희완 소령이 국립대전현충원 고(故) 윤영하 소령의 묘역 앞에서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애국, 여기 깃들다

지난달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내내 유쾌했던 소령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미 각이 잘 잡힌 군복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모자를 반듯하게 매만졌다. 현충원 후방에 위치한 ‘제2 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을 안내하던 이희완(39) 소령은 묘역을 알리는 현수막이 시야에 들어오자 말을 멈췄다.

[대전= 연합통신넷, 심종완기자] 수많은 묘비가 자로 잰 듯 일렬로 쭉 늘어선 모습을 대면한 취재진도 잠시 말을 잃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장함에 가슴이 턱 막혀왔다.

고(故)윤영하 소령의 묘역 앞에 그가 섰다. 말없이 경례를 한 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묘역을 바라보며 이 소령은 2002년 6월 29일, 뼈아픈 기억을 끄집어 냈다. 참수리 357호 부정장이었던 그 당시를 회상했다.

“그 해 6월엔 이상하리만큼 북한 함정과 대치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아마도 우리가 월드컵 축제 분위기에 빠져 있다는 걸 북한이 노린 것 같습니다. 그 날도 아침부터 작은 도발을 시작했고 결국 북한 함정 2척이 동시에 북방한계선인 NLL을 침범하면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31분간 이어진 전투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북한 함정의 무력 도발에서 대한민국 바다를 지켜낸 대가로 젊은 장병들은 꽃 보다 붉은 선혈을 조국의 바다에 뿌려야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윤영하 정장님이 뒤로 쓰러지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정장님을 구하러 달려갔는데 정장님을 1m남짓 앞두고 저 역시 쓰러졌습니다. 포를 맞아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이 떨리는데 미동도 없는 정장님을 보니 일단 지휘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부하들에게 몸을 은폐할 수 있는 공간으로 피하라고 지시하고 함수(배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전속력을 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구조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포에 맞아 함정 곳곳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공간이 좁은 함정의 특성상 모든 사람을 동시에 구조하는 일은 어려웠다. 조타장이었던 한상국 중사는 결국 구조되지 못했고, 배를 인양한 뒤 시신을 건져야 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그의 발목을 잡을 만한데, 그는 다시 군복을 입었다. 성치 못한 두 다리도 그의 군인정신을 지배하지 못했다.

이 소령은 국립묘지를 자주 간다. 그 곳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주는 전율이 좋고, 전투를 함께 치른 전우들과 소주 한잔을 하기도 좋아서다. 초등학생이 된 자녀들은 아빠와 함께 오는 국립묘지를 좋아한다.

가끔 아이들은 그에게 “아빠,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라고 묻는다. 아이의 천진한 물음에 묘지를 둘러보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묘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분들이 아직도 이렇게 많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늘어나는 묘비 수만큼 대한민국도 그 분들 덕에 건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국립묘지에 갈 것입니다. 제게 국립묘지는 소임을 다한 참군인의 안식처입니다.”

현충일이 다가온다. 이날 현충원에는 성묘 온 몇몇 가족들과 장례를 막 마치고 국립묘지를 찾은 유가족들 만이 묘비를 지켰다. 끝도 없이 도열된 묘비들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국립묘지는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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