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과 속마음
제가 젊어서 한 때 권투사업에 종사하느라고 일본어를 독학으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일본 권투 계와의 비즈니스가 성행하던 때였거든요. 덕분에 선생도 없이 배운 일본어로 도쿄에 시합을 하러 갔을 때, 수 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유창하게 기자회견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터득한 것이 ‘혼네(本音)’와 ‘다떼마에(たてまえ: 建て前)였습니다. 우리말로 ‘속마음’과 ‘겉모습’이라고 할까요? 제가 일본 측 선수를 불러오거나 매니져나 푸로모터를 초청할 때에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시합을 가거나 초청 받아 갈 때에는 번 번히 깨졌습니다. 약속한 기일이 끝나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태도가 돌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보같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야 그들의 두 마음을 터득한 것이지요.
일본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기 이전에는 이른바 춘추전국 시대를 살아 왔습니다. 오늘의 성주가 자고나면 사라지고, 내일은 또 다른 성주가 주인이 되어 버리는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난세를 살아오며 살아남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길들여 지다보니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많이 쓰여 져 왔는가봅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소오까모 시레마셍((그럴지도 모릅니다)’ 또는 ‘쓰미마셍께도(미안합니다만)인데, 똑 부러지게 미안하다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미안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안 된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쨌든 일본말은 그들의 사고패턴을 알고 잘 들어봐야지 어설프게 들었다간 낭패를 보기 일쑤이지요.
한문에 외선(外善)이란 겉으로는 착하지만 속은 악한 것을 말합니다. 말은 바르되 행동이 그에 따르지 못하고, 행동은 따르되 일이 미덥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겉치레 선은 속에 악의 씨를 잔뜩 품고 있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악이라도 반드시 하늘의 화를 받는 것이 인과의 법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그 악을 베풀어 쓰기 때문이지요.
악한 마음을 먹고 행하면 남이 알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하늘은 소소영령(疎疎英靈)하기가 태양처럼 밝은 것과 같이 사람은 밝은 양심이 있어 스스로 비춰보게 합니다. 그러나 계속 양심을 외면하면 어두워져 나 자신을 망치고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이지요. 이 겉모습과 속마음이 서로 다른 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고 합니다.
‘표리부동’은 마음이 음흉하여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표(表)’는 거친 흰 무명의 겉감이고, ‘리(裏)’는 거친 흰 무명의 안감을 나타내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표리’는 원래 설날에 왕과 조정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되새기자는 뜻으로 올리는 무명 옷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이 표리로 옷을 해 입는 사람이 없이 단지 행사용으로 그치고 마는 데서 ‘표리가 부동하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표’가 겉을, ‘리’는 안을 나타내므로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말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같지 않은 사람을 표리부동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성격이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은 표리가 부동하여 대개 위선자(僞善者)들일 것입니다. 겉으론 잘해주는 척 하면서 속에는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한테 하는 말이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텅 빈 정신에서 마음과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그 생각과 감정에 따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특징 중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반드시 속마음과 겉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마음은 울면서 겉으로 웃고, 속마음은 싫어하는데 겉으로 좋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뜨거운 목욕탕 속에 들어가 ‘아~ 시원하다’고 말하는 경우처럼, 인간의 말과 행동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다양하며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따듯한 말과 부드러운 웃음을 짓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얼마든지 사실을 부풀리고 왜곡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품고 있는 저의(底意)를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바른 안목을 갖추어야만 올바른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도 낭패를 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공자님께서는 소인배의 전형인 ‘교연영색(巧言令色)’ 즉, 교묘한 말과 거짓 웃음을 띠면서 얼굴 표정을 일부러 부드럽게 하는 짓을 특히 경계하셨을 것입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것처럼 들리는 말투와 환하게 웃음 짓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 표정으로 짐짓 상대를 배려하는 듯 행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가식일 뿐, 예절도 그 무엇도 아닌 까닭에 공자님께서는 교언영색을 소인배의 전형으로 못 박으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군자(君子)는 겉만 뻔지르르한 화려한 말에 속지 않고,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그 사람의 속생각과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의 겉 모습과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봄으로써, 화려한 말에도 속지 않고, 남루한 겉모습에 흔들려 옳은 말을 놓치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자께서는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참된 본성이란 정성이 지극한 것이다. 정성이 없으면 남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억지로 곡을 하는 사람은 비록 슬픈 체한다 해도 슬프게 느껴지지 않고, 억지로 화난 척하는 사람은 비록 엄하게 군다고 하더라도 위압을 주지 못하며, 억지로 친한 체하는 사람은 비록 웃는다 해도 친근하게 느끼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슬픈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진정 슬퍼 보이고, 진실로 노한 사람은 성내지 않아도 위압을 느끼게 하며, 진실로 친한 사람은 웃지 않더라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참된 본성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그 정신이 밖으로 발하여 움직이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참된 본성이 귀중한 것이 되는 것이다.”
겉모습과 속마음이 조금도 다르지 않는 삶! 그것이 곧 완전한 자유와 지극히 행복(至福)한 삶이고, 그것을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도 또는 진리’와의 합일(合一)이라 하지 않을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2월 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