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라는 유령
면죄부(免罪符)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죄를 면하는 대가로 금품을 받고 발행한 증명서를 말합니다. 서기 800년경에 레오 삼세가 시작하여 대대로 교회 운영의 재원으로 상품화한 것이 면죄부이지요. 이 면죄부는 15세기 말기에는 대량으로 발행하여 루터의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종교 개혁의 실마리가 되었든 것입니다.
그 면죄부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횡행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아직 우리나라 재벌총수들이 한 번도 제대로 벌을 받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과를 무시한 면죄부를 그들은 갖고 태어난 특별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며칠 전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과 관련해 면죄부를 내린 서울고법 정형식 부장판사를 특별감사 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사람이 3일 만에 20만 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2월 5일부터 ‘정형식 판사에 대해 이 판결과 그동안 판결에 대한 특별감사를 청원합니다.’란 제목으로 시작된 이 청원을 청와대는 ‘한 달 내 2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이기 때문에 청원마감 한 달 안으로 공식 답변을 내놓게 돼 있다고 합니다.
청원 인들은 “국민의 돈인 국민연금에 손실을 입힌 범죄자의 구속을 임의로 풀어준 정 판사에 대해 이 판결과 그동안 판결에 대한 특별감사를 청원한다.” “국민 상식을, 정의와 국민을 무시하고 기업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며 부정한 판결을 하는 부정직한 판결을 하는 판사에 대해 감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353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정경유착과 뇌물 공여에 대해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에 대해, 세계 주요 외신들은 한국에선 수 십 년에 걸쳐 재벌 임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관행과 ‘삼성 공화국’의 현실이 여전하다고 보도했습니다.
5일 미국 <뉴욕 타임스>는 “삼성의 실질적 지도자인 이 부회장이 석방되자 한국인들은 수 십 년 간 싸워왔던 관행을 다시 확인했다”며 “재계 거물이 부패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도 철창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다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판결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대통령 탄핵 등 지난 2년간 벌어진 특별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는 신호가 됐다. 여전히 그들은 ‘삼성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6일자 아시아판 1면 하단에 이 소식을 전하며 “삼성 지도자에 대한 판결은 개혁을 향한 희망에 타격을 입혔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한국은 대기업 임원의 유죄 판결을 대통령이 사면해주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관행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해왔기 때문에 이 부회장이 사면될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블룸버그>는 “정말 실망스럽다”거나 “정치권력이든, 돈이든 힘을 가진 인물이 언제나 이긴다.”는 각계 시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습니다. CNN 방송은 “거대한 삼성 제국의 지도자는 기대보다 빨리 감옥을 벗어났다” “한국은 악명 높게도 화이트칼라 범죄를 가볍게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재판에서 5년이 선고됐을 때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이 있었으나 이번 결과는 실제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꼬집었습니다.
정말 이번 판결은 일파만파(一波萬波)입니다. 이 부회장 석방 관련 기사에는 재판부의 판결을 비판하는 글들이 도배를 이루고 있습니다. 국민의 법 감정에 어긋나는 비상식적 판결이라는 지적 일색인 것입니다. 법조계 안팎에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분출되고 있습니다.
정연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은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부회장에 대한 판결은 겉으로는 유죄 판결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정농단에 대한 완벽한 면죄부를 내려줬다”고 했습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이번 판결은 평등 원칙에 어긋나는 위헌적 판결”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 부회장을 기소했던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편파적이고 무성의한 판결”이라고 반발하며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진영 논리에 따라, 가치 판단에 따라 이재용 부회장의 2심 판결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입니다. 이번 판결을 두고 이정열 전 부장판사는 “역대 급 쓰레기 판결”이라 했고,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 등의 극과 극의 상반된 반응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계에 사느냐에 따라 법은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적용되는 모양입니다. 라면 한 상자를 훔친 생계형 절도범에게 징역 10개월의 실형이 선고 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36억 원의 뇌물과 국회 위증, 횡령 혐의가 있는 대기업 총수가 면죄부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이재용’이 살고 있는 세계의 법과 일반 국민이 살고 있는 세계의 법이 동일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재판 결과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판결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재판부가 이 부회장이 ‘피해자’라는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의 강요와 요구에 의해 뇌물을 건넸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입니다. 결국 이번 판결의 핵심은 재판부가 이 부회장을 ‘피해자’로, 박 전 대통령을 ‘가해자’로 규정했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삼성의 국정농단 범죄에는 사법부의 책임이 작지 않습니다. 이재용은 반드시 엄정하게 처벌받아야 합니다. 특검은 즉각 상고하고, 대법원은 이 면죄부 판결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면죄부라는 유령(幽靈)은 사라져야 합니다. 면죄부 없는 사회라야 이 땅에 정의를 바로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과의 진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이니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2월 9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