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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관수(寬遂)..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칼럼] 관수(寬遂)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2/20 06:18 수정 2018.02.21 18:44
덕산 김덕권칼럼니스트

관수(寬遂)

관수(寬遂)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그러움을 완성하다’는 뜻일까요? 우리민족의 3대 경전의 하나인 <참전계경(參佺戒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고구려 고국천왕 때 유명한 재상 을파소(乙巴素)는 일찍이 묘향산맥중의 백운산 중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국조 단군(檀君) 성신(聖神)으로부터 하늘의 글(天書)을 얻게 되었다합니다.

이 천서(天書)를 일러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 하였습니다. 참전(參佺)이라 함은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됨을 꾀한다.’ 는 뜻입니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이라 하는 삼화경(三化經)이 있는데 단군왕검께서 '참전계경 366훈'으로 가르쳐 뭇 백성을 치화(治化)하셨던 것이라 합니다.

‘참전계경 제142사(事)’에 나오는 ‘관수’란 ‘너그러울 때 일이 이루어짐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너그러우면 즐거워하고, 내가 너그럽지 않으면 근심스러워합니다. 이는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나에게 이익이 남고, 관용을 베풀면 나에게 손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네요.

그러나 진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너그러울 때입니다. 내가 너그러울 때에 즐겁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어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과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질게 살면서 마음의 중심이 너그러우면 둥글게 돌고 돌아 즐거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 미국대표로 참석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대북정책에 있어 미국과 동맹국들 간 “관용은 없다(no daylight · 햇빛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CNN에 따르면 펜스 부통령은 이날 귀국 행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미국과 한국, 일본은 북한이 핵 · 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할 때까지 경제적 ·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필요가 있다는 데 한 치의 이견이 없다”면서 이같이 밝힌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날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북측과의 회담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며 ‘최대한의 압박’에 대한 필요성을 재차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CNN은 펜스 부통령과 문 대통령이 대북 정책에 있어 외교적 입장을 달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흔들림 없는 강경 기조를 고수하는 미 정부와 펜스 대통령과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 보도를 보고 저는 어찌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부통령이 물론 미국의 정책 때문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북한대표로 참석한 김영남 북한대표단장과 눈 한 번 마주치지도 않고 외면한 것은 아무리 보아도 편협하고 옹졸한 처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전계경 제271사 보궁(保窮)>에 ‘보궁’이란 궁함을 돕는 것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의 궁함을 돕고, 뜻을 이루면 남의 궁함을 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너그럽지 못하면 자신의 어려움도 도울 수 없고, 남의 어려움도 도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자기 가슴 속에 사랑이 많은데, 그 사랑을 쓰지 못하고 가슴에 가두고만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순수한 사랑의 에너지를 자신에게 보내고, 남과 함께 나눌 때,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기쁨의 샘물, 행복의 샘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편협해서는 안 됩니다. 옹졸해서도 안 됩니다. 관용(寬容)이 있어야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질다’라는 의미의 한자 ‘인(仁)’은 맹자가 인간의 기본윤리로 제시한 오상(五常),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입니다. ‘인’이라는 한자는 두 가지의 짐을 진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남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따라서 인의 근본적인 의미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입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管仲)의 청년시절 이야기에는 항상 친구 포숙아(鲍叔牙)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근데 물론 관중도 위대하지만 너그럽기는 포숙아인 것 같습니다, 관중이 가난하던 시절, 관중은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습니다. 이익을 나눌 때 관중이 더 가졌는데 포숙은 관중을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이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관중이 일찍이 포숙을 위해 일을 꾸몄는데 오히려 상황이 더 옹색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포숙이 관중을 어리석은 놈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형세가 유리하고 불리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세 번 출사(出仕)하여 세 번 다 주군에게 쫓겨났어도 포숙은 관중을 못난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관중이 때를 못 만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세 번 싸워서 세 번 다 달아났지만 포숙은 관중을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만 하면 포숙아가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겠지요? 포숙아가 아니었으면 관중이 아무리 하늘을 이고 도리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결코 제나라의 환공을 춘추오패(春秋五覇)의 반열에 서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용’은 좁은 뜻으로는 남의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을 뜻하나, 넓게는 자신과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의 인격권과 자유를 인정하는 것으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미덕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이 관용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져야 할 법적, 도덕적 문책까지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관용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잘못인지 명확히 알며, 참된 반성과 함께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진심어린 사죄와 져야 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야 관용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성실한 사람 깨끗한 사람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관용하고 덮어주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원리 원칙만 앞세워 단죄(斷罪)하면 사람이 등을 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까다로운 사람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인복(人福)이 많은 법입니다. 그 인복을 얻는 법이 참전계경이 말하는 ‘관수’가 아닐 런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2월 2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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