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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으로 돌아가 예수의 낮은자세로 임하자..
사회

초심으로 돌아가 예수의 낮은자세로 임하자

김현태 기자 입력 2015/04/30 12:05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다시 한번 두레사태를 바라보며 분명히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공정한 보도와 알권리를 충실히 전하고자 한다.

[서울= 연합통신넷, 김현태기자] 1616년 3월5일 로마교황청은 한 의미심장한 결정을 내렸다. 지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 2000년 동안 유럽사회에 수용되어온 천동설을 만천하에 다시 한 번 천명한 것이었다. 이로써 당시 과학계에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지동설은 불온사상으로 낙인찍히며 음지로 내몰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본지를 대표하여 6월 9일 언론중재위에 위 기사내용 http://www.newsyh.co.kr/detail.php?number=3132&thread= 으로 이문장목사측의 재소로 다녀 왔다.

이런 내용을 갖고 언론이 수사건을 갖고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이 이문장 목사나 이문장측에 내용을 물으면 중대한 도덕적 침해까지 있을 법한 내용을 시인 하겠는가?,.  

중재위를 다녀 와서 생각을 많이 했다. 현 두레문제는 김진홍목사의 책임이 크다고 말하고싶다. 그와 더불어 후임목사의 책임이다.

과연 두레가 (김진홍목사, 이문장목사) 활빈교회로 돌아 가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할 수가 있을까?

한 가지 고백은 본지의 기자도 두레교회를 5년 가까히 다녔다,. 그리고 떠나야 했던 이유가 전에 느낀 김진홍목사에서 변하였다는 점이다. 인간적으로 낮아지기를 바라는 목회하는 사람에서 너무나 높은 곳만 바라다 본다는 것에 실망감이 컸다.

개인적으로 두레사태를 바라보며,. 재 평가를 할 두 사람이 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이문장목사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둘 다 1941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74세다. 둘 다 경상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둘 다 20대에 서울로 올라갔다. 둘 다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둘 다 젊은 시절 빈민가에서 목회했다.
 

1970년대 초 이들이 목회했던 곳은 넝마주이, 창녀, 거지, 막노동꾼, 깡패, 장애인들이 뒹굴고 살던 신설동, 중랑천, 청계천의 빈민가였다. 다 같이 사용하는 변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이 아침이 열릴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혈기 왕성했던 30대 초반 시절, 둘은 한편으로는 넝마주이로, 다른 한편으로는 성직자로 이들과 더불어 살았다.


▲  1970년대 청계천 하류 일대는 무허가 판자집 집성촌이었다. 그 뒤로 새로 짓는 건물들이 보인다. 박정희가 추진한 산업화, 근대화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이 사진은 당시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어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의 일부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허병섭은 1971년 목사가 되어 군목 생활을 한 뒤, 1974년 중랑천과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살았다. 서울시에 의해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작업이 진행되자, 이번에는 산으로 올라갔다. 1976년 하월곡동 산꼭대기에 동월교회라는 달동네 교회를 세웠다.

거기서 가난한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똘배의 집'이라는 코믹한 이름의 탁아소를 세웠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료 진료를 알선해주었고,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장만을 위해서 공동 주택 조합을 만들었다. 정부의 무자비한 철거 폭력이 벌어질 때는 몸으로 맞서 싸웠다.

이러한 그를 박정희는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1976년 서울 시경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50일이 넘도록 몽둥이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그 이후 연행과 구금만 20번이 넘었다.

전두환 시절인 1986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때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외치면서 분신하고 할복할 때였다. 그는 "왜 젊은이들이 죽어야 하나, 차라리 목사들이 희생되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분신을 기도했다. 이 일이 자극이 되어 150명의 목사들이 민정당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허병섭은 시위 주동자로 찍혀서 6개월 넘게 옥살이했다.

▲  당시 기독교 성직자들도 빈민가에 교회를 세우거나 아예 이들 안에 들어가 함께 살면서 이들에게 위안과 새 힘을 주는 일을 했다. 이 사진은 당시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어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의 일부다.

하지만 그는 한계를 느꼈고, 실망했다.


청계천에서, 달동네에서, 차가운 유치장 바닥에서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30~40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에 감화되어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1982년 이동철(본명 이철용)이 소설로 쓰고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 <어둠의 자식들>, <꼬방 동네 사람들>에 나오는 목사 공병수의 실제 인물이 허병섭이다. 장애인이면서 초등학교 졸업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이 된 소설가 이철용은 5공 청문회 때 증언대에 선 전두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살인마"라고 외쳐서 유명해졌다. 그는 허병섭이 한때 포장마차 사장이었을 때 거기서 그를 만나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 지금은 역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로로서 기독교를 믿고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는 "이동철은 내가 모르는 재야 운동권의 골수들을 끊임없이 내게 소개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바로 도시 빈민 선교로 봉사하고 있던 허병섭 목사였다. 이동철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한 장본인이다. 그분이 하루는 수줍은 말투로 '좋은 영화만 있다면 극장이 바로 교회의 역할을 하므로 목사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싹텄다. 그 후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바보 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내 영화에는 허병섭 목사가 던진 기독교적 화두가 깊이 작용했다"고  회상했다.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끌려간 강원도 어느 부대에서 허병섭과 인연을 맺은 양국주(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국제 대표)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허병섭이 최전방에서 군목으로 지내던 시절, 당시 중위 봉급이 2만 원이었는데, 1만 원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나머지로 담배와 껌을 사들고 병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전역 후에는 포장마차 사장이 되었다. 다음날 장사할 몫을 떼어내고 남은 걸로 동네의 일용직 노동자, 부랑자들에게 공짜로 뜨거운 오뎅 국물과 소주를 먹였다. 내가 제대한 뒤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만지게 되어서 허 목사에게 20~30만 원씩 건네주면, 으레 술 먹고 싸우다가 유치장에 들어간 사람들 빼내오는 일에 쓰는 듯했다."

군목이 병사들에게 복음은 안 전하고 담배를 전하다니. 성령에 취하도록 하지 않고 술에 취하도록 만들다니. 저주하고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무당을 교회에 불러 함께 예배하지 않나, 노가다 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랑 어울려 술 먹고 담배 피우고 화투판을 벌이지 않나. 그러더니 결국은 사고를 쳤다.

허병섭은 1988년 기장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했다. 기장에서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는 동월교회에서 평신도와 평등하게 사역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종교 성직자보다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의 신앙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훨씬 힘들다는 교인들의 고민에 공감했다. 또 노동자와 함께 구속됐을 때 경찰이 목사에게는 존칭어를 쓰고 노동자에게는 욕설과 위협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라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받는 특혜를 괴로워했다.

목사직을 버린 다음 막노동판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미장질을 배웠다. 2년 뒤에는 일용직 건축 노동자들의 공동체인 '건축 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건축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중간 하청업자에 의존하지 않고, 건축주와 건축 노동자 간의 직거래를 텄다. 그로 인해 발생한 차액의 이윤만으로도 빈민 노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 현장에서 빚어지는 온갖 비리와 모순을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건축 노동자가 노동의 객체가 아니라 노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민중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며, 노동력을 팔아서 잘살아보려는 시장 경제 논리는 경매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을 초라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노동자들과 뒹굴 때 품었던 생각이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한계를 느꼈다. 동시에 자기의 한계도 느꼈다. 그래서 더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기로 했다.

1996년 무주로 내려갔다. 마을 이름은 진도리(眞道里).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담고 있는 땅 이름이라서 더 좋다 했다. 여기서 농사지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면서 살았다. 농약 쓰지 않고 오리와 우렁이를 풀어 짓는 유기 농법을 실험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씨앗이라는 생명은 미생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부식시킨다. 주변 미생물들과 치고받고 먹고 먹히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를 '밀알 노동'이라 말하고 싶다.

씨앗 하나가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거기에서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힌다. 땅속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작은 자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밀알 노동이고, 자신을 분해하고 희생한다는 뜻에서 밀알 노동이다.

성서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밀알 노동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육체 노동, 몸의 노동, 밀알 노동으로 시골의 일상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올해 1월에는 2만 평 가까이 되는 땅을 마을 공동 재산으로 내놓았다. 옛날에 교회에서 받은 돈과 이리저리 마련한 돈을 모아 5000만 원으로 산 땅이다. 하지만 그는 "잠시 빌린 것일 뿐 내 땅이 아니다"며 그걸 자연환경국민신탁에 맡겼다. 여기서 생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자연도 보존하고 마을 주민의 소득도 높이는 산촌 마을 자립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면서 대안학교인 푸른꿈고등학교와 온배움터(전 녹색대학)에 관여했으나, 총장이라는 직함보다 공동 대표, 공동 교사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미약한 시작, 창대한 나중

30살의 전도사 김진홍은 허병섭처럼 청계천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1971년 세운 활빈교회가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배달학당'을 만들어 청소년을 교육하고 '배꽃어린이집', '장미어린이집'이라는 탁아소를 만들어 어린이들을 돌봤다. 주민자활회, 의료봉사회 등을 조직해 빈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  30살의 전도사 김진홍은 71년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세우고, 탁아, 교육, 자활, 진료 사역을 했다. 이 사진은 당시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어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의 일부다.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 같은 좌절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낙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믿었다.

"나는 청계천 둑 위를 걸으며 상상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면 어느 곳부터 방문하실까? 분명 세종로나 명동 같은 곳은 찾지 않으실 거다. 이 악취 나는 청계천을 찾으실 테지.

예수님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둑길을 걸으며 말씀하실 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판자촌 주민들이여, 다 모이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푹 쉬게 하는 동민 위안의 밤을 열어드릴 것이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밀가루 다섯 포대와 동태 두 마리로 청계천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다." (김진홍의 자전 소설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반대 운동이 격렬해지자 대통령 긴급 조치라는 걸 발동했다. "유신 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하는 운동을 하면 징역 15년 형에 처한다"는 기막힌 명령이었다.

김진홍 목사는 1974년 1월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시국 기도회를 연 죄목으로 다른 목사, 전도사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김진홍, 이해학 전도사가 주동자로 찍혀서 15년 형을 받았는데, 그나마 1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당시 이들의 변론을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성서적 진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으로 유신 통치와 긴급 조치를 반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고 했다. 김진홍은 2004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주 투사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닌데, 어쩌다 줄을 잘못 서서 징역을 살았다. 어영부영 콩밥을 먹게 되었다." 보수 세력을 설득해야 할 때는 이렇듯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1976년, 청계천 철거 작업이 강행되자 허병섭은 산으로 올라갔다. 반면 김진홍 목사는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현대판 출애굽을 이끄는 한국판 모세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두레 공동체 운동이다. 허병섭과 김진홍 목사의 인생이 극명하게 갈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두레 운동이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김진홍 목사는 이때부터 '잘나갔다'.

그가 청계천 시절을 바탕으로 1982년에 쓴 신앙 수기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24년이 지난 2006년에 100쇄를 넘겨서 30만 권이 넘게 팔렸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세계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1989년에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쓴 자전 소설, 만화, 설교집, 묵상집은 수십 권에 이른다. 이메일로 보내는 '아침 묵상'을 받아보는 사람은 10만 명이 넘는다.

1995년 적십자사 봉사상 금장을 받았고, 1996년 모교인 계명대에서 명예철학박사가 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잠시 교수도 했다. 2001년에는 미국 킹칼리지 명예신학박사가 되었고 그해 계명대학교, 계명문화대, 계명유치원, 동산의료원을 운영하는 계명기독학원 이사장도 했다.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허병섭이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이를 고사하는 바람에 같이 빈민 운동을 했던 제정구가 후에 그 상을 받게 된 것과는 딴판이다.

두레 공동체는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다. 미국에 있는 땅이 1000만 평방미터가 넘고, 미얀마의 땅은 300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세계 곳곳의 두레 땅만 한데 모아도 웬만한 도시 하나는 세울 법하다. 해외와 국내에 각각 8개씩의 교회를 세웠다. 두레 공동체가 만든 대안학교, 복지센터, 문화센터 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  71년 청계천에 세운 활빈교회와 비교할 수 없이 큰 활빈교회(두레교회)가 36년 뒤인 2007년 경기도 구리에 세워졌다.  
 
두레 사태의 책임은 김진홍 목사에게 있다

김진홍 목사는 1997년 경기도 구리에 구리 활빈교회(지금의 두레교회)라는 교회를 세웠다. 10년 뒤인 2007년에는 예배당에 5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4층짜리 새 교회를 건축했다. 1971년에는 무허가 판자촌에 가마니 깔고 교회를 세우더니, 36년 뒤에는 경기도 구리에 대형교회교회를 세웠다. 입당 예배에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참석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 8장 7절에 나오는 성경 구절로 만든 장식용 현판은 신장개업한 동네 중국집보다 창대해질 대로 창대해진 두레와 김진홍에 어울린다. 그가 목사라고 하니, 이 구절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새벽을 깨우는 일이 나의 사명이다. 어둠에서 잠자고 있는 민중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사명은 위대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 일생을 살아야 한다. 한밤중에 잠들어 있는 한국 교회에 새벽이 다가옴을 알려야 한다.

가난과 질병에 잠들어 있는 청계천 판자촌의 6만 형제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모른 채 호화로운 주택에 잠들어 있는 부자들에게도 새벽을 알려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새벽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종소리에 일어난 듯 가까운 집의 창문에 등불이 밝혀지고 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

김진홍 목사의 창대함은 2005년 뉴라이트전국연합을 만들어 상임의장이 된 뒤, 30년 지기(知己)인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지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정치적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 2009년부터는 목회에 주력하겠다며 두레교회로 돌아갔다.

경기도 구리에 있는 두레교회는 청계천 빈민 선교로 '넝마주이 전도사'라고 불렸던 김진홍 목사가 1997년 창립한 교회다.

 

이후에도 목회생활을 열심히 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이 김진홍 목사의 설교를 좇아 교회로 몰려들었고, 교회는 10년 뒤인 2007년 5000명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할 정도로 크게 부흥했다. 김진홍 목사는 만 70세가 되던 2011년 11월 19일 미국 고든콘웰신학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문장 목사를 두레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세웠다.

 

이문장 목사는 고든콘웰신학대와 예일대 신학부를 거쳐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석학이다. 김진홍 목사가 세운 두레장학회 1기로 김 목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 온 그는, 부임 초기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김진홍 목사는 위임 전 1년 동안의 공동 목회 때부터 이문장 목사에게 당회장직을 맡기고, 장로 제도를 7년 단임제로 고쳐 교회 원로들이 자신과 함께 물러나도록 했다. 이문장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이문장 목사의 리더십은 순항하지 못하고 있다. 전체 시무장로의 절반인 16명의 장로가 이 목사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년 8월부터 '두레교회바로세우기협의회'(두바협)라는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이 목사가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고, 당회를 독단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회에서 시작된 갈등은 작년 말 교회 전체로 번져 나갔다. 두바협 장로들이 12월 26일 "당회가 분열되어 부교역자 인사와 재정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전체 교인들에게 보냈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교회는 이문장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과 반대하는 교인으로 양분됐다.
 

급기야 지난 12월 29일에는 이문장 목사 측 교인들과 두바협 장로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이 목사는, 교회 홈페이지 '두레교회 회복을 위하여'라는 게시판에 직접 글을 올려 두바협 장로들이 사실을 왜곡해 담임목사를 흔들고 있다며 반박하고 나섰다.


너무 다른 두 사람, 그리고 이문장목사는 활빈으로 돌아가 목회를 할 수가 있을까?
한편 고마워야 할 부분도 있다. 잘 만든 교회에 숫가락만 올려 둔 셈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참 많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서울 상경, 신학 공부와 목사, 빈민들과 어울림, 민주화 운동과 감옥살이,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삶,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 만들기, 수많은 사람들이 받은 감화와 변화, 심지어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재혼한 것까지.

두레교회는 인구가 많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는 다 어디로 갔을까. 교회가 많고 신도수가 늘어날수록 사회가 정화되고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이다. 왜 그럴까.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잘못 전해서일까. 어찌 보면 그들이 종교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면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이 예수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세속적, 물욕으로 살아간 탓이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이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신자들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종교의 타락이나 부패에는 반드시 돈이 개입된다.

사실 교회만큼 장사 잘되는 곳이 없다는 속설은 빈 말이 아니다. 사회에서 쭉정이로 불리던 일부 사람들이 어리바리 신학교 간판을 달고 나와서 목사, 전도사 하는 바람에 이들이 한국교회를 장사하는 교회로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일부 대형교회의 물량주의와 그곳을 다스리는 제왕(?)같은 목사들 탓이 크다. 막대한 규모의 큰 교회들과, 그곳을 발판 삼아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목사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가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또한 부 자체를 죄악시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을 통해 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가 축복’이라 거나 또는 ‘부를 추구하라’는 식의 내용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다.
 

이제 두레를 비롯하여 한국교회는 달라져야 한다. 얼마만큼 성경 말씀에 충실하고 실천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이다. 더불어 예수 같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본받고 실천할 수 있도록 솔선을 보여야 한다.

두레의 모습, 진정 두 목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2011년 김진홍 목사 후임으로 두레교회 담임에 오른 후, 이듬해인 2012년 자신을 둘러싼 일부 의혹이 시발점이 돼  후임 후 2년 만에2013년부터 교회 내홍을 겪고 있는 이문장 목사가 목회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예배 중에 행한 설교의 이단성 문제로 소속노회로부터 기소가 돼 6월24일 최종 재판을 앞두고 있다.
 
현재 두레의 사태를 바라보며 과연 이문장목사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 http://www.newsyh.co.kr/detail.php?number=3285&thread= 것 처럼 선임목사가 후임을 잘 못 선택하여 "내평생에 가장 잘 못은 후임을 잘 못 세운것을 후회를 할 정도" 라면 이문장목사는 전,후를 따지기 전에 반성부터 해야하고,. 흩어저 있는 성도를 다시 부르고,. 서운해하는 두레교회바로 세우기회원들도 따뜻하게 진정성을 갖고 대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두레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김진홍목사에게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삶도 나름 최선을 다해 왔다고 인정을 한다. 김진홍목사는 30여 년 전 악취 나는 청계천에서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번듯하게 변신한 청계천에서 창대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거닐던 청계천 둑길에 오셨던 예수님이 이명박과 김진홍이 함께 거닐고 있는 지금 청계천 둑길에 오실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목사로서 특혜가 부끄럽다며 목사직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간 허병섭은 차가운 1월 화려한 도시의 어느 길목에 쓰러졌다가 발견되어, 한 달이 넘도록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일주일 먼저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다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체력 저하로 갑자기 뇌에 손상이 온 것은 아닐까 의심할 뿐, 원인도 모른 채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화려함과 창대함은커녕 비참하고 초라한 노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30년 전 청계천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죄인들의 친구, 위로, 희망의 상징이었다. 번듯하게 변신한 청계천에 예수가 다시 오실까. 이 사진은 당시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찍어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의 일부다.

교회가 많은 건 세상이 어지러워서 그런지 아니면 교회가 많아서 세상이 어지러운지 판단키 어렵다. 다만 교회가 늘어나는데도 사회악은 일소되지 않고 각종 범죄가 창궐하는 걸 보면 교회가 자기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0여 년 전 청계천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이 시대의 참된 목사를 찾아보기를 원하는 수많은 죄인들은 지금 어디서 누구를 만나려 할까. 나는 한 알의 작은 밀알이 되어 죽고 썩어지려 하나, 창대하고 화려하게 번성하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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