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콤플렉스의 어머니다.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과거의 어떤 심리적 충격’이 켜켜이 쌓여 콤플렉스 덩어리로 응고되는 것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감정적으로 강조된 심리가 통상적 의식활동을 방해하는 현상’을 콤플렉스라고 정의했다. 무엇인가에 마음을 과도하게 빼앗겨 다른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의 심리 저변을 ‘배신 트라우마’가 휘감고 있다는 분석은 널리 회자돼왔다. 박 대통령은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배신의 정치에 대한 국민 심판’을 거론했다. 메르스를 확산시킨 책임자에 대한 국민심판이라면 모를까, 총선이 10개월이나 남았는데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라는 대통령의 요구는 너무도 뜬금없고 생뚱맞다. 아무래도 대통령이 무엇인가에 크게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다른 것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염려스럽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가 이젠 통상적 의식활동을 방해하는 콤플렉스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 것이다.
배신 트라우마가 이젠 의식활동 방해하는 콤플렉스로
트라우마(trauma)를 보통 ‘정신적 외상’으로 번역하는데, 심리학에선 ‘영구적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일컫는다.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탓하거나 비난할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있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도 일찍이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리오”라고 읊지 않았던가. 트라우마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트라우마는 한층 성숙한 인간을 만들기도 한다. 커다란 트라우마를 겪고도 심리적으로 성숙해진 경우를 심리학자들은 ‘외상 후 성숙(Post-Traumatic Growth)’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의 트라우마는 배신이다. 일기와 자서전에서 배신에 관한 쓰디쓴 경험을 자주 토로했다. “오늘 옛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인생 무상함을 또 한 번 느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그들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한결같은 경우가 그야말로 드물었다. 모두가 변하고 또 변하여, 그때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배신을 하고 이러저러하게 변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의 내 주변도 몇 년 후 어찌 변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1991년 2월 10일에 쓴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2007년에 출간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유신 때는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인생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해 가는 측면이 있다. 박 대통령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까지 하며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나중엔 ‘독재자의 딸’로 지목돼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때 믿었던 사람들이 권력에서 밀려나자 순식간에 등을 돌릴 때 경험한 쓰라린 ‘배신의 추억’이 깊다란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병이 되기도 한다. 트라우마에 과도하게 반응하면 콤플렉스가 된다. “콤플렉스란 특정 상황에 대해 과도하게 방어하는 행위다. 과거의 충격적 경험과 관련된 신호들을 모두 위험으로 받아들여 방어적 행동을 한다. 여기에 콤플렉스의 위험이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콤플렉스를 다룬 저서 <마음에 박힌 못 하나>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배신에 대한 집착은 복수에 대한 다짐으로 이어진다. 배신감에 치를 떨수록 복수에 대한 다짐은 더욱 사무친다. 박 대통령이 ‘배신 트라우마’에 과도하게 반응할수록 ‘복수 콤플렉스’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
배신에 대한 혐오…능력보다 충성도로 사람 기용
일국의 대통령이 과거의 트라우마에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된다. 배신에 대한 극단적 혐오는 무엇보다 적재적소 인사를 어렵게 한다. 능력이 아무리 출중한 사람이라도 충성도가 입증되지 않으면 중책을 맡기지 않으려 한다. 능력보다 충성도를 최우선으로 따져 사람을 기용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에 불거진 정윤회씨와 ‘청와대 비서진 3인방’의 국정농단 의혹도 박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에서 비롯했다는 분석이 많다.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다 보니 박 대통령과 오래 일해온 소수 측근들이 국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는 것이다. ‘불통’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이 혹시 배신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보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제대로 소통이 될 리가 없다.
‘배신 트라우마’는 의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2011년 서청원 전 대표와 청산회에 보낸 송년 메시지) “고마운 사람은 나에게 물 한잔 더 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시류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으며 진실한 태도로 일관된 사람들, 진정 빛나는 이들이었다.”(자서전) 2009년 8월엔 심재엽 한나라당 전 의원의 강릉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해 “사람의 도리 중에는 의리를 지킨다는 게 있습니다. 의리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라고 말했다. 명분과 가치는 내팽개치고 오로지 의리만 외치는 정치라면 조폭집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명분과 가치 대신 의리만 외치면 조폭집단
믿고 의존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다고 여길 때 상처는 더욱 깊어지는 법이다. 받은 상처만큼 응징하고 보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쉽다. 박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도 측근의 배신에 더욱 강하게 반응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대표적 사례다. 김 대표는 한때 ‘원조친박’이었다. 박 대통령이 2005년 한나라당 대표를 할 땐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도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김 대표가 2010년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하며 다른 길을 걷자 박 대통령은 “친박엔 좌장이 없다”며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김 대표를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김 대표가 배신했다고 여긴 박 대통령은 철저하게 복수를 했다. 김 대표가 최근 박 대통령과 맞닥뜨릴 때마다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때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했을 거란 분석이 많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이마에 ‘배신자’란 선명한 주홍글씨를 새겼다. ‘여당의 원내사령탑’이라고 콕 찍어서 유 원내대표가 찍어낼 표적임을 숨기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밝히며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유승민 의원의 대구 동구을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내년 총선에서 떨어뜨려 달라고 대놓고 요구한 것이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박 대통령이 정치적 근거지인 대구의 유권자들에게 ‘유승민을 떨어뜨리라’고 만방에 공표했으니 유승민 원내대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아찔했을 것이다. 유 원내대표가 26일 “박 대통령께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대통령께서도 저희에게 마음을 푸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길 기대한다”고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것도 이해가 간다. 정치란 게 이렇게 비루한 건가라는 쓴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유 원내대표 역시 박 대통령과 ‘대표-비서실장’으로 호흡을 맞췄던 핵심 측근이지만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박’이 지원한 이주영 의원을 꺾으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했다.
참으로 공교롭다. 국정의 파트너인 여당의 대표와 원내대표가 하필 한때 측근이었다가 돌아선 사람들이니 박 대통령으로서도 짜증이 날 법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다. ‘배신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한다면 결코 국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는 때로 인간을 파괴와 파멸로 이끈다. 대통령이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갇혀 있다면 국가적으로 매우 위험한 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