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이준석 기자] 1일 KBS에서는 3.1절 특집다큐 '3월 1일, 어느 가문의 선택'을 방송한다.
1919년 3.1 운동의 중심에 한 독립운동 가문이 있었다.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 일본 동경의 2.8독립선언 3.1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 독립운동 명문가인 ‘김순애 가문’의 활동상을 추적한다.
■ 3.1운동의 주역인 김순애 가문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종로 탑골 공원에서 학생과 시민의 만세 시위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3.1운동이 성공하기까지 국내외에서 활약한 ‘김순애 가문’의 존재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되고,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선포되었으며,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 ‘김순애 가문’이 있었다.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에 헌신한 공로로 모두 여섯 명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김순애 가문’. 3.1운동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 명문가인 ‘김순애 가문’의 역사적 선택에 주목한다.
■ 글로벌한 3.1운동을 준비한 김순애 가문
● 프랑스, 일본, 중국, 국내에서 활동한 가문 사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당수인 형부 서병호와 민족교육자인 동생 김필례 등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자, 국내외에서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할 민족대표를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의 대표이자 민족대표로 김규식이 파견되었다. 당시 김규식과 김순애는 결혼한 지 2주에 불과했다. 파리위원부 대표인 김규식은 프랑스와 미국 및 유럽 각국에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알리며 큰 반향을 일으킨다.
김순애의 남편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소식이 국내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대회가 열린다. 이때 김순애의 조카인 김마리아는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장으로 2.8독립선언에 깊게 관여했고 일경의 취조를 받는다. 석방된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국내로 밀입국하여 국내에 독립시위의 필요성을 전하기 시작한다.
남편 김규식을 파리로 떠나보낸 후 김순애는 형부 서병호와 함께 국내로 밀입국하여 국내 만세시위의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중국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들어온 김순애는 대구에서 김마리아를, 광주에서 동생 김필례 부부를 만나 3.1운동을 촉구하는 힘겨운 여정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서울에서 민족지도자 함태영, 평양에서 송죽결사대 회장인 김경희를 만난 후 중국으로 탈출한다. 또한 조카인 김마리아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가 3.1만세시위에 가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 파리에서 남편 김규식의 활약에 이어, 일본 동경에서 조카인 김마리아 그리고 국내에서 김순애와 형부 서병호까지 3.1운동의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한 ‘김순애 가문’의 활약과 그 여정을 추적해간다.
■ 3.1운동 후 광복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순애 가문
● 김순애의 상해 대한애국부인회와 서울 김마리아의 대한애국부인회
3.1운동 후 김순애는 상해에서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한다. 김순애가 주도한 애국부인회는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뒷바라지하면서 해외 각자에 한국지도와 태극기 등을 보급하는 활동을 펼친다.
또한 서울에서 조카인 김마리아가 회장이 되어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와 긴밀히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김마리아는 모집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치게 된다.
● 상해임시정부와 대한적십자회에서 활약한 김순애 가문
김순애 가문은 3.1운동이 있기까지 세계적으로 글로벌하게 활동했으며, 3.1운동의 산물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곳에서 활약한다. 남편 김규식은 파리위원부에 이어 미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한다.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선출된 김규식은 이후 임시정부 부주석에 이르게 된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김순애는 형부 서병호와 함께 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의 사검과 이사로 활동한다.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간호원을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김마리아는 중국 망명 후 임시의정원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 ‘최초’로 기억되는 김순애 가문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인 김필순과 중국의 ‘영화황제’인 김염
김순애의 오빠인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 중 한 명이다. 김필순은 동생인 김순애와 김필례 그리고 조카 김마리아가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가지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김필순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망명을 선택한다. 중국 헤이룽장성의 치치하얼에서 북제진료소라는 병원을 열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지원하고, 이상촌을 건설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안타깝게도 일본인 첩자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알려진 김염은 김필순의 아들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항일영화에 출연하며 일제에 항거한다. 중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인기 있는 배우인 김염은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며,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상업영화 출연을 거부하고 '대로'와 같은 항일영화에 출연하며 독립운동 가문의 후손으로 살아간다.
●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국비유학생, 한국YWCA를 창립한 동생 김필례
김순애의 여동생인 김필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국비유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한국 YWCA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폐교된 광주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를 복교하였다. 김필례 교장은 평생 동안 민족교육과 여성교육에 헌신하였다.
●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 명문가
‘김순애 가문’은 3.1운동을 전후하여 유럽, 중국, 일본, 한국에서 글로벌하게 활동했다. 이 프로그램은 특히 대지주 가문의 후손들이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함으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점에 주목한다. ‘김순애 가문’은 몸의 병을 고치는 의사, 마음의 병을 고치는 목회자, 무지를 깨우치는 교육자를 다수 배출하였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크게 이바지하였다.
KBS 3.1절 특집다큐멘터리 '3월 1일, 어느 가문의 선택'은 1일 오후 4시 5분 KBS 1TV를 통해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