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다발’ 역전 인생
2018 평창 평화올림픽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평창 평화올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신 <송승환의 ‘동시다발’ 역전 인생>이 조선일보에 보도 되었습니다. 그 송승환의 역전 인생이 너무 감동적이라 널리 전해드립니다. 다만 인터뷰 기사가 너무 길어 요약정리 하여 보내드림을 양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면 추위가 살아 움직인다.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17일 동안 평창의 추위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존재였다. 45일간, 새벽까지 이어지는 리허설을 매일 반복했던 공연 팀에게도 추위의 아귀힘은 강했다. 타는 듯한 냉기가 얼굴과 등골을 헤집고 지나갔다. 날씨가 가장 무서웠고, 또한 날씨가 가장 고마웠다고 평창 동계올림픽 개 · 폐막식 총감독 송승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폐막식이 끝난 다음 날 평창에서 송승환을 만났다. 영하 20도로 살갗을 조여 왔던 공기는 어느새 봄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흰 눈에 반사된 햇살이 창날처럼 실내에 꽂혔다. 여러 번 얼었다 녹은 땅처럼 그의 코밑은 붉게 헐어 있었다.
-기분이 어떤가요?
“멍하고 송구하고 그렇습니다. (미소지으며)이렇게 칭찬받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잘해야 본전이고 욕만 안 먹으면 된다고, 제가 스태프들에게도 단단히 일렀어요. “우리 욕먹어도 기죽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미리 마인드 콘트롤을 했거든요.”
개막식에 오륜기를 선보였던 드론은 폐막식에 수호랑으로 비행했다. 전통과 현대가 거침없이 부딪히며 뿜어내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갔다. ‘한국적인 것이 진정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가 완성되는 순간, 가슴벅차오르지 않은 한국인이 누가 있을까.
-가장 마음을 졸였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고비마다 힘들었어요. 하루에도 지뢰가 몇 개씩 터졌어요. 가장 애를 태운 건 날씨였어요. 폐회식 이틀 전엔 강풍이 일었고 하루 전엔 안개가 자욱했어요. 카메라로 잡아도 얼굴이 안 보일 정도여서 리허설을 아예 못했어요. 그런데 당일 거짓말처럼 해가 나고 바람마저 잠잠했어요. 제가 45일간 평창에 있었는데 딱 이틀 날씨가 좋았어요. 개막식하고 폐막식 날.”
-국가 행사인데 실무를 진행해야 했던 고충도 있었겠지요?
“(웃으며)무엇보다 돈이 없었어요.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어요(베이징 올림픽의 1/10 수준인 600억이 배정된 예산이었다). 베이징도 소치도 큰 행사는 주로 인력이 대거 투입되는 매스게임 형식인데, 사람을 쓸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요. 숙박, 체류, 운송 등등. 우리가 런던, 소치, 베이징 올림픽의 ‘규모’를 흉내 냈다면 망했을 거예요(웃음). 오각형 원형 야외무대에 적은 인원을 세우는 대신 그 공백을 미디어아트로 활용해 채우자고 했던 게 신의 한 수였어요.”
-송승환은 좋은 리더인가요?
“참견을 잘 안 하는 리더에요(웃음). 컨셉과 스케일에 동의하면 끝까지 믿고 맡겨요. 평창올림픽 행사도 총감독은 저지만,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의 아이디어를 저는 순서만 배치했을 뿐이에요. 작곡가, 안무가, 의상, 미디어아트 등 여러분들이 정말 열심히 해주셨어요. 그 덕에 제가 이렇게 단독 인터뷰도 하는 거죠.
-올림픽 같은 국제 행사의 리더에게 필수적인 능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호흡이 잘 맞는 스태프를 꾸려야 하죠. 2년 6개월을 함께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갈등이 없을 수가 없어요. 놀라운 건 올림픽이라는 세 글자가 갖는 힘이에요. 난파 직전에도 ‘그래도 올림픽인데… 평생 한 번 하는 건데…’ 이런 마음이 서로를 일으켰어요.”
-개 · 폐막식 총감독에 뽑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빙그레 웃으며)저더러도 공모에 참여하라는 제안이 왔는데, 전 안 했어요. 공연계 대선배들과 경쟁 PT를 해야 하는 상황이 제 정서로는 내키지 않았고, 올림픽은 우리 기획인데 심사위원들이 외국인들이라는 것도 못마땅했죠. 그런데 공모에서 마땅한 사람을 못 찾은 모양이에요. 선정위원회에서 결국 저한테 다시 의뢰를 해왔어요. 칭찬보다는 욕 들을 확률이 높은 자리라 고민하다 결정했어요. ‘시켜줄 때 하자'(웃음).”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 세 가지만 말씀해주시죠.
“첫째,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한 것. 둘째, 세계 시장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난타'를 만든 것. 셋째, MB 정부 때 문화부 장관 제안을 거절한 것.”
-문화부장관 자리는 왜 거절했나요?
“정치계와 인연이 닿는 걸 경계했어요. 지금도 정치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어느 한쪽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면, 정권이 바뀌는 이 혼란 속에 평창 행사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없었겠지요(웃음).”
-꿈이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복을 넘치게 받았어요. 벅찬 감정을 느낄 기회가 남보다 많았어요. 개막식 끝나고는 울었어요. 너무 고생한 스태프 생각이 나서… 그 추운 밤을 꼴딱꼴딱 새 가며, 그 희생을 제가 다 아는데(울먹이며), 그게 희열로 오니까 주체를 못 했어요. 저는 그런 기회를 남보다 누렸으니 지금처럼 할 일 하며 살면 돼요. 앞으로 성공하든 못하든. 비난도 받고 칭찬도 받고 하면서요.”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인터뷰 테이블 주변에서 서성이던 남녀노소 인파를 그는 너그럽게 맞아주었다. “멋진 공연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시민들은 실로 행복한 얼굴로 돌아갔다. 눈도 바람도 안개도, 밤하늘을 수놓았던 드론과 불꽃, 응원의 함성도 사라진 채 평창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송승환이라는 리더가 있었기에 동계 올림픽기간 온 국민이 행복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제 인생에 가장 잘한 것 세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 원불교를 만난 것, 둘째, 덕화만발을 만든 것, 셋째, 덕화만발 가족 모두와 함께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아닐 런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2월 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