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오판이었다. 더한 상황은 그 뒤에 이어질 참이었다. 여당 내에서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경쟁이라도 하듯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친박계와 비박계가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담할 정도였다. 이제는 친박이고 비박이고간에 유 원내대표의 “명예로운 퇴진”을 종용하는데, 뭐가 명예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새누리당은 8일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 사퇴권고 결의안’으로 유승민 정국을 마무리지을 모양이다. 지금껏 유 원내대표는 “의원들이 뽑아 준 자리이니 대통령의 뜻으로 물러날 수는 없다”며 버텼지만 의총에서 표결로 원내대표에 대한 불신임을 묻지는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의원 개개인이 자기 의견을 밝히고 토론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면서 그저 ‘대통령 심기 달래기’만을 지상 목표로 삼아 매진하는 꼴이다.
유승민 사태의 발단이 된 국회법 개정안 역시 여당 의원들이 소신을 억누르고 눈치만 보는 상황에서 사실상 폐기됐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6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됐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질 기회조차 없었다. 혹여 의원 일부라도 ‘대통령 뜻’을 거스르는 표를 던져 당-청, 친박-비박계 갈등이 도질 것을 우려해 당 지도부가 표결 불참 지침을 내렸을 터다. 애초에 여야 합의를 거쳐 다수의 찬성으로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했던 새누리당 의원들이 재의결에서 지침에 따라 투표에 불참하는 광경은, 총재의 말 한마디에 당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구시대의 국회를 떠올리게 한다.
국회의원들에게 계파싸움 좀 그만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복무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부질 없는 일이다. 표 계산에서 그들은 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고정 지지층인 대구·경북 지역을 텃밭으로 한 새누리당 의원들이 대통령과 어긋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다음 총선에서 당선(그리고 공천)을 위협하는 요소일 테니 말이다. 유 원내대표 역시 소신을 지키는 행보를 보이며 지지율이 크게 올랐으니 복잡한 속계산이 없지 않을 터다. 국민 이익을 대변하기를 기대하며 국회의원을 뽑는 유권자의 이해와, 재선출을 목적으로 삼는 국회의원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대의 민주정치의 근본적 한계다.
그 결과는 이렇다.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배신하지 않으려 국민을 배신한 결과 국회법 개정이 겨냥했던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은 여전히 모법의 취지를 위반해 진상규명 활동을 제약한 채 남아있다. 세월호특별법을 개정하는 방법이 있지만 개정 국회법조차 거부된 마당에 여당이 이런 의지를 보일 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조사위원회가 세월호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가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대통령은 세월호 사태 수습 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국민의 대표가 아닌 정파의 수장이 돼 버렸다. 대통령이 국회에서의 논의를 자신에게 대항하는 불필요한 일로 여기는 한 그는 친박계의 대통령일 뿐 국민의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국회 역시 뒷걸음질을 쳤다. 국회 과반을 점유했던 신한국당이 당 지도부의 진두지휘 아래 새벽에 야당 몰래 국회에 잠입해 안기부법과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던 그 역사적 사건이 약 20년 전의 일이다. 정파 싸움을 위한 거수기에 불과할 뿐 입법 기관으로서 역할하지 못하는 지금의 국회는 20년 전 날치기 국회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유승민 사태가 남긴 민주주의 퇴보의 유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