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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참회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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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참회의 문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3/05 22:10 수정 2018.03.07 08:46
▲사진: 덕산 김덕권

참회의 문

참으로 요즘엔 양심에 털 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양심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말하지요. 그런데 왜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 정치인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무더기로 교도소에 들어가서도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정치보복을 당하는 것이다’고 외치는 것일까요?

요즘 한창 진행되는 각계 유명 인사들이 ‘Me Too 운동’에 연루(連累)되고서도 며칠 버티지도 못하면서 예외 없이 오리발을 내밉니다. 가히 ‘양심에 털 난 사람들’의 행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혹을 받아도 사람이 양심에 털이 나서는 안 됩니다. 설혹 사람이 한 때 눈이 어두워 죄악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참회(懺悔)하지 않으면 세세생생 지옥생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진리는 조금도 틀림이 없어서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상생(相生)의 좋은 결과를 그리고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상극(相剋)의 결과를 내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 인과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 참회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惡道)를 놓고 선도(善道)에 들어오는 초문(初門)입니다.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를 행한즉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워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지요.

꼭 예전에 지었던 악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고, 그 이후에 일으킨 선은 밝은 불이 어둠을 파함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멸(滅)함을 따라 반드시 악은 없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업(業)이라 합니다. 이 업은 본래 무명(無明)입니다. 그러므로 자성(自性)의 혜광(慧光)을 따라 업은 반드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고(罪苦)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 참회의 문에 들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죄업의 근본은 탐 · 진 · 치(貪嗔痴)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 · 진 · 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지요.

이것은 비하건대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冷)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그대로 둔 즉 불의 힘은 강하고 냉수의 힘은 약하여 어느 때든지 그 물이 냉해지지 아니 함과 같은 것이지요.

세상에 전과(前過)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후과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와 같이 일시적 참회 심으로써 한두 가지의 복을 짓는 사람은 있으나 심중의 탐 · 진 · 치를 그대로 두면 어찌 죄업이 청정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 참회의 문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참(事懺)입니다.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 : 佛法僧)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입니다. 둘째, 이참(理懺)입니다.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 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지요.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으로 닦아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 · 진 · 치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 천 겁(劫)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지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들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寂寂醒醒)한 자성 불(自性佛)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삼계 육도(三界六途)가 평등일미요, 동정 역순이 무비 삼매(無非三昧)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만 죄고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 하여 고(苦)도 고가 아니요, 죄(罪)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塵大地)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淨土)라 내 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조(佛祖)의 참회요, 대승(大乘)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서울 삼성동에 있는 한 호텔에 외국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1997년도에 한국에 관광을 와서 이 호텔에 투숙을 했다고 밝힌 사람이 적은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1997년에 귀 호텔에 투숙을 했었습니다. 그때 체크아웃을 하면서 호텔에 비치된 두 쌍의 슬리퍼를 가방에 챙겨 나왔습니다. 지금이나마 죄를 뉘우치고 사과하려고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편지에 슬리퍼 값을 동봉해서 보낼 것이니 혹시 부족하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50달러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20년도 전에 저지른 작은 실수였지만 그 동안 마음의 짐으로 계속 남아있던 것을 청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호텔 측은 자신의 호텔을 오랫동안 기억해주고 사과까지 해준 투숙객에게 감사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비치용인 슬리퍼는 판매용은 아니지만 가격이 저렴해 별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 말라며 기념용 슬리퍼 한 켤레를 추가해 50달러를 다시 되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하찮은 슬리퍼 한 짝도 그냥 가져 왔다고 참회의 문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죄를 짓고도 양심에 털 난 사람들이 이 참회의 문에 들지 않는다면 영생을 놓고 볼 때 그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요?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죄업을 이 참회문에 들어 청정하게 만들어 영생을 편안하게 만들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3월 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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