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어제 의원총회 권고에 따라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유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라고 직격한 지 13일 만이다. 집권여당은 이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하부기관으로 전락했다. 삼권분립을 명시한 헌법 가치는 훼손되고 정당정치, 민주주의는 모독당했다. 대화와 토론, 협상과 합의의 정치는 실종되고 ‘공포의 통치’만 남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수십년 전 권위주의 시대로 후퇴했다.
지난 2주간 정국을 뒤흔든 ‘유승민 축출 압력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친박근혜계 대 비박근혜계의 ‘내전’에 불과한가. 유 원내대표의 사퇴 기자회견은 ‘그 이상’을 말해준다. 그는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저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청와대와 친박계의 집요하고 폭력적인 사퇴 압박이 반헌법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또한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언급하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다. 일련의 발언은 이번 사태가 단순히 ‘친박 대 비박’이나 ‘박근혜 대 유승민’의 싸움을 넘어선 ‘수구보수 대 개혁보수’의 대결이었음을 선명히 보여준다. 유 원내대표의 사퇴는 새누리당 내 수구보수의 승리, 개혁보수의 패배를 의미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160명이 대통령에게 겁먹고 자신들의 대표를 쫓아내는 모습은 새누리당의 과거 회귀를 증언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남을 터이다.
박 대통령은 완승을 거둔 것인가. 표면적, 단기적으로는 그럴지 모른다. 국회법 개정안 재의결을 무산시킨 데 이어 ‘배신자 유승민’도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 말 한마디로 여권의 판을 통째로 흔들 수 있다는 위력과 존재감을 유감없이 각인시켰다. 하지만 남은 임기가 줄어들수록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서 봉건왕조의 군주나 조직폭력집단의 두목을 연상케 하는 퇴행적 리더십을 드러냈다. 자신이 현대 민주공화국의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국민의 심판 운운하며 국회를 겁박하고,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를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토로하며, 사적 감정에 휘말려 국회의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무시했다. 핵심 지지층 가운데서도 품격과 자제력을 잃은 대통령의 모습에 충격받은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결국 이 모든 언행은 박 대통령이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강한 척하는’ 지도자에 불과함을 방증한다. 기실 박 대통령이 강한 지도자였다면 유 원내대표를 찍어내는 일이 이토록 시끄럽지 않았을 터이다. 박 대통령이 특정인을 겨냥한 ‘복수극’에 열중하는 사이, 대통령직의 권위와 국정의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유 원내대표의 낙마는 청와대와 집권당의 관계가 흘러갈 방향을 예고한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오더’에 따라 자신들의 손으로 의결한 국회법 개정안을 폐기하고, 직접 뽑은 원내대표를 몰아냈다. 원내대표를 불신임하면서 표결조차 거치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의원들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정신은 물론이려니와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조차 내팽개친 당은 더 이상 공당이라 일컫기 어렵다. 향후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 당 대표와 원내대표 등 투톱은 청와대의 충실한 ‘메신저’ 노릇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호통과 협박과 짜증으로 새누리당을 줄 세우는 데 성공한 박 대통령은 헌법이든 당헌·당규든 개의치 않는 ‘사실상의 총재’로 군림할 게 분명하다. 대통령의 독주와 집권당의 실종이 민생에 미칠 악영향이 두렵다.
여야관계의 경색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이미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를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야당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기보다 사사건건 ‘백기투항’을 요구해온 터이다. 이런 판국에 야당과의 협상을 주도해온 유 원내대표를 쫓아냈으니 당분간 여야 간 생산적인 대화와 합의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유 원내대표는 지난 16년간 매일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한국 정치사의 치욕으로 기록될 어제, 시민들은 한 줌의 권력에 눈이 어두워 헌법과 민주주의를 배신한 이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왜 정치를 하는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이에 뭐라고 답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