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덕산 김덕권 칼럼] 장지(將至)..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장지(將至)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3/07 08:42 수정 2018.03.08 07:52
장차 오는 세계가 삶의 목적을 성공에 두고 벌이는 무한경쟁과 황금만능주의의 결과를 우리는 끊임없는 대립과 인간성 상실, 그리고 지구 환경 파괴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덕산 김덕권 칼럼니스트

장지(將至)

《참전계경(參佺戒經)》제154事에 <장지(將至)>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을 보면「將至者 將來也 哲人大道 爲萬世人規 然 物盛卽規衰 趁痼未完 祛爲福利」‘장지란 성인의 큰 도로서 다가오는 미래를 예비함을 말하느니라. 성인의 큰 도는 세세토록 사람들의 규범이 되느니라. 그러나 물질이 풍성해지면 법도가 쇠약해지고, 물질에만 의존하는 고질병이 만연하여 완치가 되지 않으니, 진정한 행복과 이익이 떠나게 되느니라.’

<장지>란 장차 오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오는 세계가 삶의 목적을 성공에 두고 벌이는 무한경쟁과 황금만능주의의 결과를 우리는 끊임없는 대립과 인간성 상실, 그리고 지구 환경 파괴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는 삶의 목적을 정신문명의 완성에 두는 시대일 것입니다. 물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물질은 인간 내면의 성장을 위해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少太山 : 1891~1943) 부처님께서는 개교표어로 “물질이 개벽 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외치셨습니다. 소태산 부처님은 이 개교의 동기에서 “오늘날 과학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 고해가 없으리오.”라 하셨습니다.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그 전과 비교하여 빠른 속도로 물질문명을 단기간에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편리함의 혜택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아 권력을 가진 자들은 물질의 세력을 더 차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립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개인의 양심을 상실하고 타락하며 범죄와 부패 등이 만연하는 등 정신이 쇠약해져 그 폐해가 정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를 겪은 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수준에 비해 국가 청렴도와 공공기관 청렴도 그리고 인문학적 정신 수준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과연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요? 당당한 물질의 주인공으로 존재할 것인지 아니면 물질개벽 속도에 정신개벽이 따라가지 못해 물질의 노예로 존재할 것인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이전을 선천(先天)이라 하고, 그 이후를 후천(後天)이라고 부릅니다. 원불교에서는 물질문명이 발전된 세상을 후천개벽시대로 보고,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정신개벽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신개벽이란 낡은 세상이 지나가고 새 세상이 돌아온다는 후천개벽의 사상과 새 세상의 주인이 되고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신개벽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물질과 정신은 원래 하나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선후를 나눈다면 정신이 주(主)가 되고 물질이 종(從)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소태산 부처님은 당시의 시국과 세계를 바라보면서 물질문명만 발전되고 정신문명이 발전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문명이 아니라고 보셨습니다. 따라서 물질문명을 선도(先導)할 수 있는 정신문명을 일으켜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닌 완전한 문명을 이루자는 것이 원불교의 주장입니다.

그 정신개벽의 구체적 방법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로 얻는 <삼대력(三大力)>의 힘으로 과학문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 인류의 행복에 증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문명과 과학문명이 서로 바탕이 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참다운 문명이 이룩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후천개벽인 것입니다.

특히 후천시대에는 ‘천권(天權)’시대에서 ‘인권(人權)’시대로 바뀌어서 마침내 ‘덕권(德權)'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덕권‘을 갖춘 사람이 바로 삼대력이 갖추어진 사람으로 세상의 주체가 될 것이 아닌지요?

서가모니의 깨달음의 핵심은 연기(緣起)입니다. 이 연기에 대한 통찰은 ‘공(空)’ 즉. ‘무아(無我)’의 사상으로 인간이란 존재를 생물학적 존재에서 영지 적(靈知的) 생명체로 이끌어내었습니다. 30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난 영적 혁명이었지만, 소태산 부처님도 서가모니 부처님도 그 깨달음은 연기에 정확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일원(一圓)》과《사은(四恩)》의 세계관은 연기적 세계의 실상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즉, <천지(天地) 부모(父母) 동포(同胞) 법률(法律)>이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다는 사은사상의 핵심은 우주전체를 포괄하는 개별적 존재들이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상호 어떠한 관계의 법칙성으로 연계되고 있는지, 그 연기적 세계의 실상을 상생 적, 상보적 관점에서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입니다.

일원사상은 그 질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임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씀은 바로 원불교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불교가 인류의 문명사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혹은 왜 원불교가 탄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 존재의 근거를 밝히는 핵심적인 사상이지요.

이와 같이 물질문명이 발전되면 될수록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정신문명이 확장되어야함에도 우리의 정신은 피폐(疲弊)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이제 누군가는 정신의 세력을 확장시킬 대안을 찾아내야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꺼져가는 인간과 생명의 가치를 되살려내야만 합니다.

지금 세상은 남의 것을 못 빼앗아서 한이고, 남을 못 이겨서 걱정이며, 남에게 해를 못 입혀서 근심입니다. 그러나 오는 세상에는 남에게 주지 못하여 한이고, 남에게 지지 못하여 걱정이며, 남을 위해 주지 못해서 근심인 시대가 찾아옵니다. 그 시대가 바로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의 세상입니다. 그것이 정신개벽의 시대요, ‘장지’의 시대가 아닐 런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3월 7일

김덕 권(길호) 합장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