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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하나
[서울= 연합통신넷] 안데레사기자= 소녀는 2001년에 태어났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배에서 나왔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인간의 기억이 형성될 무렵인 4살 때, 소녀는 '모야모야병' 진단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뇌혈관이 막히는 희귀질환. 우리나라에는 아직 정식 통계가 없어 연간 100명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란다. 소녀는 어린 나이에 뇌수술을 받았고, 소녀의 곁에 있던 보호자는 부모도 친척도 아닌 보육원 선생님이었다. 사람들은 소녀를 '고아'라고 불렀다.
보육원 생활은 답답했다.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려면 엄격한 규율이 전제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선생님은 유난했다. 밥을 5분 안에 먹지 않으면 운동장 20바퀴를 뛰라고 했다. 수녀님이 학대사실을 알게 된 즉시 선생님은 쫓겨났다. 하지만 아직도 소녀는 당시의 피해경험을 안고 산다."그냥 어렸을 때 많이 맞았어요."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이다.
엇나가기 시작했다. 남들이 겪는 사춘기가 소녀에게는 조금 빨리 찾아왔다. 학교에 가지 않고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다. 경찰서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친한 보육원 언니들과 보내는 시간이 유일한 해방구였다. 사람들은 소녀를 '문제아'라고 불렀다.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반복되는 일탈을 보육원은 더 이상 받아줄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대구에 있는 보육시설로 보내졌고, 친한 친구들과 언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상 가족이었던 이들과 생이별을 겪는 셈이었다. 절차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 기억을 '쫓겨났다'고 표현한다.
평생을 살아온 보육원을 떠나 낯선 도시,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녀의 비행과 일탈은 계속됐다. 소녀를 질타하는 이들만 있었을 뿐 소녀의 사춘기를 인내심 있게 받아줄 가족 같은 존재는 없었다. 거리로 나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들을 만났다. 이해받는 느낌을 받았다. 대구의 보육원에서마저 쫓겨났다. 그렇게 소녀는 갈 곳 없는 '가출청소년'이 됐다.
● 이야기 둘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소녀는 종종 아픔을 느꼈다. 물리적인 통증이었다."눈이 안 보이거나 팔다리가 잠깐 안 움직이거나 머리가 그냥 깨질듯이 아프거나 했어요."소녀는 지난 기억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보통 사람은 평생 한번 겪을까 말까 한 고통이 소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된 지 오래였고, 거리를 전전하며 잘 곳을 찾아 헤매던 사이 소녀의 뇌혈관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좁아지고 있었다.
어느 새벽,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다. 같이 지내던 친구가 불러준 119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뇌 사진을 찍어보니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주일 뒤 입원해 재수술을 받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육원에 있을 땐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거리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제대로 병원 진료를 받지 못했다.
"쉼터를 계속 옮기고 옮겨가지고 이제 정착할 거주지가 없어서 병원도 못 갔어요. 아프긴 아픈데 병원가면 진료비 내야 하잖아요. 그래서 진료비가 없어서 그냥 안 갔는데요, 병원."
결국 소녀는 두 차례에 걸친 재수술을 받았다. 일단 수술은 잘 끝났지만 앞으로도 괜찮으리란 보장은 없다. 곁에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다행히 진료비 문제는 해결됐다. 의료급여 지원으로 대부분 비용이 처리됐고, 나머지 비용에 대해서는 병원과 사회복지단체가 도움을 주기로 했다.
문제는 퇴원한 다음이다. 안정적으로 정착할 곳이 마땅치 않다. 가출청소년 보호활동가의 집에 일단 머무르기로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거처일 뿐이다. 언젠가 다시 쉼터와 거리를 떠도는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른다.
돌아갈 학교도, 가정도, 보육원도 없는 소녀는 이제 고작 14살이다.
● 범죄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가출청소년 자립 지원' 절실수술을 몇 시간 앞두고 병실에서 소녀를 만나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거리에서 한 번, 입원할 때 한 번, 어느덧 세 번째 만남이었다. 뇌수술을 위해 머리카락 일부를 밀고 사인펜으로 칠한 두피를 가리키며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14살짜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너무도 거칠고 처절한 삶을 담고 있었다."여기서도 쫓겨나고 저기서도 쫓겨나고 이제 아무 데도 안 받아줘요."멋쩍게 말하는 소녀 앞에서, 마이크를 대고 질문을 하는 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근래 들어 가장 마음이 무겁고 고통스러운 취재였다.
소녀가 거리로 나가게 된 건 누구의 책임일까. 서울 보육원만의 잘못도, 대구 보육원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 사회와 제도가 소녀를 거리로 내몰았다. 지금으로선 이 소녀처럼 한번 시설을 벗어난 아이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들과 사회를 잇는 끈이 없어져 버리는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이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되고 혹은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들이 범죄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난 18대 국회에서는 '청소년 가출예방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다.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법안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우선순위와 관심에서 밀린 이유는 뻔하다. 이 법의 수혜를 받는 가출청소년들은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청소년 수만 명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
지난 해에도 가출청소년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고백하자면 그전까지는 가출청소년에 대해 좋지 않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제 발로 집을 나온 애들이잖아.' 막연하게 가출의 원인과 책임을 그들에게 지운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가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청소년 가출 원인의 61.3%는 부모님 등 가족과 겪는 갈등이다. 상당수는 가정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 알코올중독 아버지의 주먹을 피해 '생존'하고자 집 밖으로 탈출한 아이가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편의점을 터는 일이 벌어진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악순환의 고리다. 가출청소년들 스스로에게 그런 고리를 끊으라고 하는 건 너무도 가혹하고 무책임하다. 구조를 바꾸는 건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다.
● "집 나온 애들이 문제 아니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문제여전히 누군가는 소녀의 처지를 두고 '자초한 일'이라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그러게 보육원에서 말을 잘 들었어야지, 똑같은 환경에서도 너처럼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는 애들이 있잖아, 언제까지 더 기회를 줘야하니, 라고. 글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얼마나 모범생의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사춘기 시절 방황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청소년들의 치기어린 일탈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수가 없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하나다. 일탈을 후회하게 된 순간 돌아갈 곳이 있느냐 없느냐. 방황하다가 돌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설득하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가정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존재가 있다면 일탈이 일탈로 끝날 수 있겠지만, 그런 존재가 없어 내쳐진다면 일탈이 일상화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소녀처럼 가정이 없는 아이들, 가정이 있더라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떡해야 할까. 사회가 그 역할을 나눠해야 한다. 국회가 법을 만들고, 정부가 제도를 만들고, 민간단체가 지원을 하고. 그들에게 가정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줘야 한다.
내가 소녀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의 모습처럼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난 자신이 없다. 그들보다 더 나은 출발점에서 인생을 시작해 자라온 어른으로서 그들도 내가 누린 것만큼의 최소한의 보호는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소녀에게 미안했던 마음에도 불구하고, 취재하고 기사 쓰기를 멈출 수 없었던 이유이다.
*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사회복지팀과 서울시립청소녀건강센터 <나는봄>이 소녀의 치료비를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따로 도움을 주고 싶으신 분들은 arm@sbs.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