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6일 2012년 대선에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는지 여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다시 재판을 하라고 판결했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불법선거' 시비는 대선이 코앞이던 2012년 12월 11일 국정원 직원 김모씨가 선관위에 적발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이듬해 4월 특별수사팀을 꾸려 수사에 착수했고 원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 심리전단이 트위터 등 인터넷을 통해 정치, 대선 관여 글을 올린 사실을 확인했다.
트위터 계정 약 700개 포함 항소심서 '선거개입' 판단 주된 근거
'425지논'은 '4월25일 논지'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A4용지 420여장 분량인 이 파일은 2012년 4월25일부터 그해 12월5일까지 매일 작성하며 원 전 원장이 내린 지시사항의 요점을 담은 것이다.
파일은 날짜와 '논지 해설', '금일 이슈 및 논지설명' 등의 제목하에 그날그날 트위터에서 어떤 이슈를 트윗할지를 정리해놨다. 또 여행·상품·건강 관련 정보나 유익한 영어표현, 직원들의 경조사 등 개인적인 정보도 포함됐다.
같은 계정에서 나온 '시큐리티' 파일은 영문자 'security'란 이름 앞에 's'가 붙은 A4용지 19장 분량의 텍스트 파일이다. 이 파일에는 김씨 자신이 쓴 트위터 계정 30개와 비밀번호가 기재돼 있다.
또 심리전단 다른 요원들의 이름 앞 두 글자와 이들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트위터 계정들도 나열돼 있다. 자신의 트위터 활동 내역과 함께 리트윗 할 우파 논객의 트위터 계정, 트위터 팔로워를 늘리는 방법도 적혀있다.
특히 시큐리티 파일에서는 트위터 계정 269개와 이를 기초로 하는 트윗덱 연결계정 422개가 나왔다. 2심은 이 계정이 요원들의 것이라고 판단, 요원들의 트윗 개수를 1심의 11만3천621회에서 27만4천800회로 넓혀 잡고 선거운동 혐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판단이 잘못됐다고 봤다. 심리전단 요원 김모씨가 이 파일들이 자신의 메일 계정에서 나온 것은 맞지만 파일을 작성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313조는 작성자의 진술이 없으면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같은 법 315조2호는 금전출납부 등 '업무상 통상적인 문서'는 작성자의 인정 없이 증거로 쓸 수 있다고 예외규정을 뒀고 2심은 이 부분을 따랐다.
[서울= 연합통신넷]김현태, 심종완기자= 그러나 대법원은 "두 파일은 여행이나 경조사 일정 등 업무와 무관한 개인적 내용도 포함돼 있으며 그 양도 상당하다"고 "두 파일이 업무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다고도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2심이 국정원의 정치관여 및 선거운동에 관여했는지를 판단할 때 기초 사실로 삼은 이 파일들이 증거능력을 잃으면서 원 전 원장에게 내려진 2심 판결은 결국 유지될 수 없게 됐다.
1심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활동이 '정치관여'는 맞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선거운동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능동적·계획적 행위와 당선 또는 낙선의 목적의사가 필요한데, 원 전원장의 행위는 이런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법 "원세훈 대선개입 사건 재심리하라"…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원 심리전단이 남긴 댓글 등을 면밀하게 분석한 끝에 다른 판결을 내놨다.
재판부는 내용과 성격에 따라 심리전단이 작성한 글을 '정치 글'과 '선거 글'로 나눈 결과 선거 국면이 시작된 시점을 중심으로 그 비율이 크게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된 2012년 8월20일을 본격적으로 선거 국면이 시작된 시점으로 본 재판부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선거 글의 비중이 높아졌다며 국정원의 선거개입도 사실로 봐야한다고 판결했다. 18대 대선이 국가기관이 개입된 불법선거로 이뤄졌다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면 현 정부는 불법선거를 통해 탄생했다는 비판을 안고 가야 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증거능력'을 이유로 재판을 파기하면서 불법선거는 당분간 논란으로 계속 남게 됐다.
한 변호사는 "대선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국정원의 대선개입 인정 여부는 역사적인 판결이 될 것"이라며 "파기환송심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대법원이 선거법 위반 혐의의 핵심 증거를 부정하는 판단을 내림에 따라 파기환송심에서 선거법 위반이 유죄로 판단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