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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사상과 관조..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칼럼] 사상과 관조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3/13 22:49 수정 2018.03.15 22:45
덕산 김덕권 칼럼니스트

사상과 관조

중생(衆生)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어째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까요? 자아(自我)의 상(相), 타인의 상, 중생의 상, 생명이 존재하는 시간의 상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는 이 네 가지를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생은 이 사상(四相)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럼 바로 이 사상만 여의면 우리는 중생을 면하고 불보살(佛菩薩)의 위(位)에 오르게 되는 것을 말함이지요. 그 사상을 여의려면 우선 내 자신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으면 중생의 탈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관조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일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든 작게 보면 문제만 보이고 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크게 바라보면 어디서 잘못되어졌는지가 잘 보입니다. 문제는 크게 봐야만 답이 보이는 것이지요.

‘견시관(見視觀)’이란 말이 있습니다. 볼 견(見), 볼 시(視), 볼 관(觀) 이 세 가지는 모두 보는 것이지만 보는 차원, 수준이 다릅니다. 볼견은 견해(見解)를 갖고 보는 것입니다. 볼 시는 시각(時角)을 갖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견해와 시각을 갖고 보면 다툼이 생깁니다. 통찰력을 가지고 두루 보는 것이 관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갖게 되면 견해와 시각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관을 가지려면 욕망(慾望)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그 욕망을 벗어나는 것이 관조입니다. 관조란 고요한 마음으로 내안의 욕망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는 이런 사상이 우리 영혼을 구속하기 때문에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고 싶다면, 이 네 가지 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혜능(慧能 : 638~713)은 이 네 가지 상을 수행자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능동적인 주체와 수동적인 대상, 즉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고 다른 생명을 경멸하는 것을 아상이라 하고, 자신은 계율을 지킬 수 있다고 자만하며 계율을 어긴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인상이라고 하고, 이 세상의 고통과 윤회를 증오하여 천상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을 중생상이라 하며, 이 세상에 오래 살고 싶어 복업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그것이 집착인 줄 모르는 것을 수자상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이 네 가지 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를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이라 하고, 하나로 통틀어 ‘무상(無相)’이라고 하지요. 금강경에서는 ‘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면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상’을 현상으로 해석한다면, ‘무상’은 현상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상’에서 중요한 것은 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육조혜능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지요. ‘무상’이란 다양한 현상에 흔들리지 않고, 대상이 무엇인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현상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현상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금강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최고의 마음 수행 법칙이지요. 바로 모든 현상에서 ‘공성(空性)’을 발견하고,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 아닌가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싫어도 그를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관조하며 자신이 왜 그를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를 싫어하는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는 것입니다. 누가 내게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은 그저 인연일 뿐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질 허망한 현상이며, 내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눈앞에 있는 꽃이 아무리 향기롭고 아름다워도 그것을 영원히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결과임을 관조할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이 꽃이 천천히 시들어 사라질 것임을 안다면, 눈앞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든 꽃이든 아니면 어떤 무엇이든, 가만히 관조하면 그것에 유혹되어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이 사상을 관조하여 중생을 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참회(懺悔)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를 것입니다.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세상을 개척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는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지난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관조하고 다시는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참회를 하다가 과거의 어떤 잘잘못이나 현재의 어떤 잘못이 떠오를 때, 그것이 아치(我癡) · 아만(我慢) ‧ 아견(我見) · 아애(我愛)의 어느 것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셋째, 이기심(利己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관조는 한두 번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이기심에 대한 관조(觀照)는 자꾸자꾸 해야 합니다. 이 관조를 꾸준히 해도 삶이 훨씬 좋아집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잘 다스리는 것. 곧 이 생각들이 무명(無明)에 뿌리를 둔 이기심에 의해 덧없고 실체 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즉시 대자유와 대 성취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은 무한한 능력이 있고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어떤 방향으로 트느냐에 따라 내 인생도 바뀌고 다른 사람의 인생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항상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관조입니다. 우리 이 관조로 사상을 여의면 중생을 면하고 불보살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3월 1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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