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과목이 등장한 2005학년도 수능부터 지난해 2015학년도 수능 문제까지 살폈더니 근현대사 문제는 균형감 있게 풍부해졌다가 슬그머니 쇠락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전에 한두 문제 출제되던 근현대사는 선택과목으로 독립해 매해 20문제씩 출제됐다. 문제도 늘었고 이를 공부하는 학생도 늘었다. 근현대사 시험이 마지막으로 치러진 2013학년도 수능에선 근현대사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이 15만8269명이었다. 사회탐구 분야 선택과목 가운데 사회문화, 한국지리에 이어 세 번째로 응시생이 많았다. 현재 20대인 당시 고등학생들이 근현대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10만 명 넘게 시험 보던 근현대사 과목은 2013년 사라졌다.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전근대사와 근현대사가 한국사로 통합됐다. 대신 동아시아사가 선택과목으로 신설됐다. 한국사로 통합되자 수능 근현대사 문제는 줄었다. 2014~2015학년도 수능 한국사에서 근현대사 문항은 8~14개였다.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선택한 수험생도 4만2471명이었다. 수능에서 근현대사의 비중이 대폭 축소된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수능 문제의 경향도 조금 변화했다.
1. 정부 정책 공과에서 업적으로
2005학년도 수능 근현대사 20번은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였다. 예시문을 보면 ‘정부는 근대화를 표방하면서 각종 사회 개조 작업을 펼쳐나갔고, 그 일환으로 생활 개선 운동을 추진하였다’고 나온다. 정부의 정책 목표를 명확히 서술했다. 이어지는 예시문은 정책의 부작용도 함께 나열한다. ‘그 결과 정부는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를 보장하기보다는 국민의 일상생활까지도 조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과정이 가지는 공과를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한-일 협정도 2006학년도 수능에서 예시문을 통해 명암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과거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양쪽의 의견을 공평하게 서술함으로써 수능을 보거나 기출문제를 풀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실시된 수능 문제는 미묘하게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2012학년도 수능 근현대사 12번은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을 고르라는 문제다. 전두환 정권 때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까지 다뤘다. 하지만 당시 경제 상황의 원인을 고민하기보다 학생들이 시대별로 중요 사건을 외워야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에 가깝다.
2013학년도 수능 근현대사에서 출제된 17번 문제는 더 나아간다. ‘100억불 수출 달성 기념우표 발행’ 시기의 경제 상황에 대해 묻는 질문인데 이전에 출제된 것과 달리 예시문과 보기에 경제정책의 부작용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다. 10년째 중·고등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학원 강사 심용환씨는 “이 문항은 문제건 보기건 모두 유신 시대의 경제적 성과만 나열하고 있다. 이전 수능 문제가 정권의 공과 과를 다뤄 토론을 유도했다면 이후 수능에서는 정권의 경제 업적만을 물어보는 경향성이 엿보인다”고 지적했다.
2. 노동운동에서 새마을운동으로
2006학년도 수능에서는 노동운동 관련 사건을 꼽으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예시문에는 ‘전태일 분신’ ‘YH무역 노조원, 신민당사 농성 중 강제 해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결성’ ‘노사정위원회 발족’ 등 이후 한국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굵직한 노동 사건이 열거됐다. 국정교과서로 공부한 세대가 보았다면 ‘매우 진보적인’ 것으로 놀랄 만한 문항이다. 한국 교육과정이 나중에 노동자가 될 청소년에게 헌법에 규정된 권리인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에 대해 잘 알려주지 않는 현실에서 이 문항들은 시험에 등장한 보기 드문 노동3권 사건이다. 특히 보수 언론이나 보수 정권에서는 입에도 올리지 않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라는 민주노총의 정식 명칭이 소개된 것도 눈에 띈다.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따라 노동운동 역시 성장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문제도 출제됐다. 2009학년도 수능 18번 문제는 ‘저임금 노동력과 외국 자본 도입에 기반한 수출 산업의 급신장에 힘입은’ 시기에 나타난 사실을 꼽으라고 했다. 보기로 최저임금과 파업 등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한 YH무역 사건과 전태일 사건이 등장했다.
노동법도 지키지 않는 정부를 규탄하며 서울 청계천 거리에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을 다뤘던 수능 문제는 이후 사그라들었다. 대신 ‘잘살아보세’로 국가개조운동에 나선 새마을운동이 수능 문제로 등장했다. 2011학년도 수능 20번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옳은 설명을 고르라는 문제였다. 예시문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보기 역시 저곡가 정책으로 인해 피폐해진 당시 농촌의 현실이나 새마을운동의 한계 등에 대한 서술은 생략한 채 업적만을 열거했다.
12년간 대입 수능을 지켜본 김남수 돌마고등학교 역사교사는 “근현대사 과목에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문제점에 대해 2009학년도까지 출제됐다. 2011학년도에 새마을운동이 처음으로 문제에 등장했고, 이후 3저 호황과 외환위기, 수출 100억달러 달성 등 이전에 안 나오던 소재가 튀어나온 게 눈에 띈다”고 평가했다.
이 흐름은 근현대사 과목이 한국사로 통합된 2014학년도에도 이어진다. 2015학년도 수능 20번 문제는 1970년대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을 고르라는 질문이었다. 그래프는 이 기간에 수출액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사실을 보여준다. 정답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었다. 이전 문제와 달리, 경제 상황에 따라 노동이나 사회 운동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고르라는 보기는 사라졌다. 수능에서 진일보했던 노동이나 사회적 관점이 없어진 것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부회장인 김태우 교사는 “역사교육의 본질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통해 학습자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나가는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3. 사라진 통일·북한 문제
통일·북한과 관련된 문제는 2005학년도 수능부터 매해 한 문제씩 출제됐다. 박정희 정부의 7·4 남북 공동성명, 노태우 정부의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성명까지 골고루 문제의 소재가 됐다. 한 해도 빠짐없이 나오던 통일·북한 관련 문제는 지난해 치러진 2015학년도 수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심용환 강사는 “매해 6월과 9월에 치르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도 통일 관련 문제의 기출 빈도가 떨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남수 교사는 “올해 치러질 2016학년도 수능에서 통일 문제가 나올지 지켜봐야 한다. 이전 통일 관련 문제는 남북이 어떻게 화해하고 통일을 위해 협력했는지 공부하게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북한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우려했다.
4. 더욱 축소될 근현대사 영역
소재의 변화뿐만 아니라 근현대사 문제는 갈수록 수능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근현대사 과목이 한국사로 통합된 뒤 교과서 내 전근대사와 근현대사 비중이 5 대 5로 바뀌었다. 내년부터는 이 비중이 6 대 4로 전근대사가 더 강화된다.
게다가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11월3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밝히면서 “상고사와 고대사 부분을 보강하겠다”고 했다. 근현대사 교육이 더욱 축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김남수 교사는 “수능 문제는 교과서 단원당 비례출제하는 방식이라 현대사는 한두 문제만 출제될 수 있다”고 했다.
근현대사 문제의 축소는 한국사를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교육연구소가 2014년 고등학교 2학년·중학교 3학년 학생 1326명을 대상으로 ‘역사의식’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학생들이 가장 공부하고 싶어 하는 시대는 ‘현재와 아주 가까운 시기’(35%)였다. 다음으로는 ‘20세기의 역사’(18.2%), ‘중세의 역사’(16.1%)가 뒤를 이었다.
또 눈여겨볼 것은 2013년 조사 결과와 달리 역사 교과서를 신뢰한다는 학생 수가 대폭 줄었다는 점이다. ‘어떤 정보가 제일 정확하다고 생각할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2013년 조사에선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학생(38%)들이 교과서를 꼽았지만, 2014년 조사에선 27%만이 교과서를 선택했다. 학생들이 가장 정확하다고 꼽은 정보는 ‘교과서 이외의 역사책’(33.2%)과 ‘다큐멘터리’(28.2%)였다. 조선시대 왕조 ‘태정태세문단세’만 외우던 국정 역사 교과서 시절,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는 시민들에게 새로 배우는 교과서였다.
역사의식 설문조사를 진행한 이해영 역사교사는 “조사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역사 교과서 문제(교학사 오류, 국정화 논란)가 학생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물론 보수 정권이 등장한 뒤에도 수능에서 중요한 현대사 사건을 짚는 문제는 계속 출제됐다. 2015학년도 19번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뒤 전두환 정권의 등장 때까지의 시대상을 묻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의 등장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활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이 보기로 등장했다.
유용태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고대·중세·근대·현대 이렇게 4개의 시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사는 지금과 가까운 근현대가 중요하다. 현재에 이르는 길이 어떠했는지를 공부함으로써 현실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이해하는 게 역사를 가르치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다”라고 했다.
역사가 흙 속에 묻힌 사실을 드러내고 기록하는 작업이라면, 드러내지 않는 사실은 다시 묻힌다. 역사를 감추려는 이에게 무관심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수능에 슬그머니 그런 의도가 앞으로 끼어들지 않을까. 5·16 쿠데타를 쿠데타로 부르지 않는 이들은 그것을 안다.